Autumn Leaves

11월 어느 날, 미국의 한 무명가수가 삶을 마쳤다.

그는 워싱턴의 소규모 클럽에서 파트타임으로 노래하는, 그것도 주로 남의 노래를 부르는 그저 그런 가수였다. 11살부터 지역 밴드 활동을 시작했고, 고교시절과 대학을 거치며 커리어를 이어갔지만 대부분 동네 술집이나 결혼식장, 파티에서 푼돈을 받고 노래 부르는 일이 전부였다.

서른살이 되어서야 첫 앨범(The Other Side, 1992)을 발매하며 워싱턴 지역 음악협회의 재즈보컬상(Wammie Award)을 수상했지만, 여전히 유명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두번째 앨범은 라이브 앨범(Live at Blues Alley, 1996)이었는데, 평소 노래하던 한 클럽에서의 공연을 녹음한 앨범이었다. 이제는 밀리언셀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워싱턴포스트 지역판에 소개된 동네 뮤지션의 습작에 불과했다.

두번째 앨범을 발매한 그해 여름, 잦은 골반 통증으로 병원을 찾은 그는 흑색종 진단과 함께 길어야 6개월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그로부터 두달 뒤, 워싱턴 베이유 클럽에서 그는 생애 마지막 무대에 올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그해 가을, 세상을 떠난다.

이바 캐시디(Eva Cassidy)가 세상에 알려진 건 그로부터 2년 뒤 BBC라디오의 소개로부터다. 특별히 노래를 잘하는 것도, 기교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지만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그의 목소리를 사람들은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 후 가을이 오면 많은 사람들은 이바의 목소리로 Autumn Leaves를 듣게 되었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2017년의 가을이 갑작스레 다가온 것 같더니, 계절은 순식간에 겨울로 향하고 있다. 짧고 허무하지만 기억해야 할 이 순간을 위해 몇몇 장면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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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여느 벌초

“8월에 벌초하는 사람은 자식으로 안 친다.”

이 속담을 아버지를 통해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음력 8월 15일 추석 성묘 전에 벌초를 하는 우리나라 미풍양속에 관한 속담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9월 3일 일요일. 음력 7월 14일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8월 전 벌초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근 5년 만에 오는 벌초인 듯 한데, 아버지와 삼촌들은 매년 저 속담을 지키러 이맘때 오셨다고 하네요.

충북 음성에 모셔진 저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에 왔습니다. 전남 벌교가 본거지이지만, 전국 각지에 흩어진 9형제의 방문이 용이하도록 충북 음성에 장지를 선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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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온 길인데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벌초가위로 길을 내면서 올라가야했습니다. 큰아버지가 맨 앞에서 길을 내고 전 얌체같이 뒤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상황을 인지하고, 죄송한 마음에 얼른 앞장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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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 오르는 길은, 가을 문턱이지만 한여름 더위를 연상케하는 뙤약볕 아래의 온통 초록색 풀들이었는데,  그 속에 눈에 띄는 짙은 보라색 열매를 품은 식물들을 여러번 발견합니다. 예쁜 색깔대비 피사체에 흑백 필름 카메라를 들이대는 저를 보고, 함께 오신 숙모가 이르기를 “자리공”이라는 외래종 식물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찾아보니, 잡초이자 독초이며, 뿌리는 인삼 도라지와 비슷하여 종종 중독사고가 일어난다고 하는군요. 기후온난화로 인해 자생 식물 터전에 아열대성 외래종들이 많이 들어옵니다. 자리공은 토양 산성화의 주범이라는 잘못된 비난에 시달리며 한 때 박멸 대상이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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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산소에 도착했습니다. 묘지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려버린 무성한 잡초들이 지저분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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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1차 벌초를 마치고, 차례상을 준비하면서 한 컷. 왼쪽에 계신 분이 큰아버지, 오른쪽에 계신 분이 저의 아버지입니다. 오랜 만에 뵈니 많이 늙으셨습니다. 가운데 뒤에 서계신 분이 넷째 삼촌, 왼쪽 양산의 부인은 여섯째 숙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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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가 제거되고나니 제법 깔끔해졌습니다. 할아버지가 간만에 시원하게 이발하셨다고 큰아버지가 좋아하시는군요. 중간중간 사진 찍으면서 그래도 제일 젊은 제가 가장 많은 작업을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양쪽 팔 움직임이 정상이 아닐 정도입니다.

게다가 콘탁스의 뷰파인더를 보는 일, 그것도 초보자로서 두개를 왔다갔다 보며 땀에 범벅이 된 얼굴을 갖다대는게 여간 곤욕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포스팅하는 즐거움이 없었다면, 이번 출사는 그저 “다시는 벌초 때 카메라 들고 오지 말것” 이라는 교훈만 남겼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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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할아버지 할머니는 9형제를 낳으셨습니다. 고모도 두 분이 계시구요. 살아 생전에도 금실이 좋으셨고, 지금도 이렇게 한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관한 저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는 듯한데, 아직도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그 비스무레한 얘기만 나오면, 살짝 회피하는 기색을 보입니다. 저에게 할아버지는 엄하고, 바둑 잘 두시고, 검소하시며, 20여명의 손주를 품에 안으시고 이뻐하시는 모습으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와의 추억담으로 차례상이 조용할 순간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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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이 다 소진된 후에는 리코 GR 디지털로 몇장 더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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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마지막 필름 사진과 같은 자리에서 찍은 사진인데, 21mm 와 28mm 화각의 차이만큼 딱 느껴집니다.

 

 

차례 지낸 후, 2차 벌초를 마치고나니, 묘 주변이 더욱 깔끔해졌습니다.

가을 문턱에서 이뤄진, 가족들과의 산행, 아버지의 아버지에 관한 추억담, 그리고 뙤약볕 아래 벌초라는 중노동까지… 다분이 관행적인 일상이지만, 오래오래 남기고 싶은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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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쉽게 마무리가 되지 않는 일정이었던 것이…

모든 일정을 정리하고 서울로 바삐 올라가는 차에서 번개처럼 내리치는 공포감 엄습!!

리코 GR 을 놓고왔다는 깨달음이 번뜩!!!

출발한 지 한시간 쯤 지난 거리의 덕평휴게소에서, 차 안을 샅샅이 뒤져도 나오질 않습니다 ㅠㅠ

저 때문에 모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서, 한시간 남은 서울까지 모두 모셔다 드리고 저 혼자 다시 산소에 갈 요량이었으나, 큰아버지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휴게소에 기다릴테니 다녀오라고 하십니다. 결국 아버지와 저만 다시 음성으로 출발했는데….

출발 하자마자 넷째 삼촌에게 전화가 옵니다.

 

“내 가방에 무슨 사진기 같은 것이 들어있다”

 

 후~  기억은 안나지만, 제가 묘를 정리하면서 무심코, 삼촌의 에코백에 카메라를 넣어둔 모양입니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출발하여 다시 같은 휴게소까지 오는데 20분이 넘게 걸렸고, 불필요한 톨비까지도 지출해야했지만,  그래도 최근들어 가장 행복한 운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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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의 해프닝을 끝내고, 세 분의 기념촬영.

왼쪽의 선글라스 착용하신 분이 범인?입니다. 자신의 가방에 들어 있었다고 자수하는 장면입니다 😀 그 와중에 우리 아버지는 카메라만 들이대면 차렷 자세를 취하시는 습관을 고이 간직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들과의 정이 한층 더 두터워진 벌초 여정이었습니다.

 

 

Contax iia / Carl Zeiss Biogon 21mm f4.5 / Ilford Delta 100

Ricoh GR II

2017.09.03 충북 음성.

잡으려했던 가을의 이야기, 2016

지나간 가을의 이야기, 2016

그리고, 잡으려했던 가을의 이야기, 2016

다분히 공상적인 이야기이다. 지나가버린 가을을 잡으려 한다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내 어린 시절의 꿈은 과학자였다. 하긴 그 때는 누구나 의사, 과학자 또는 대통령 또는 장군을 꿈꾸었었다.
어린 마음에 타임머신을 만들어보겠다고, 책상 한켠에 실험공간을 꾸며보기도 했었는데, 재료라고는 사기접시 위에 전자시계가 고작이었다. 내 힘으로는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나이만 먹다보니, 고등학교 시절에는 “평행우주론” 에 대해 생각하다가 극도로 허무함을 느끼거나, 또는, “우린 언제든지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지만 ‘망각’ 을 덤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시간을 거슬러 갔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고로 우린 항상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라는 궤변을 늘어놓기에 이른다.

한때, 물리학도를 꿈꾸기는 하였으나, 물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화속 한 순간이 있다. 바로 1978년작 슈퍼맨 I,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비분강개한 슈퍼맨이 하늘로 날아 오르더니,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 여자친구를 구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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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슈퍼맨은 어떻게 시간여행을 했던 것일까?
지구를 거꾸로 돌려서 시간을 거꾸로 가게 했다는 설과, 광속을 초월해서 과거에 도달했다는 설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진위여부는 알 길이 없다. 공상과학은 ‘공상’에 더 무게가 실려있으니…

그렇다면 공상이 아닌 현실에서 지나가버린 가을을 잡으려 한다면, 수퍼히어로가 아닌 나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답은 단순하다…

s1010444비행기타고 남쪽으로 가면 된다…
한국과 교토의 단풍 절정시기는 약 3주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래서, 지나가버린 가을을 잡으러 B급사진 멤버들과 교토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너무 뻔한 이야기를 돌려 이야기하니 무안하긴 하지만, 어쨌든 교토에 도착!

s1010488교토역 앞의 흔한 여인숙, 아… 단정, 정갈, 깔끔 등등의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이 첫인상처럼, 교토의 구석구석은 단정하고 단아했다.
정갈함을 지키기 위한 교토인들의 노력은 때로는 강박관념에 가까울 정도로 보이기도 했다.
정말 쉴새없이 빗자루질을 한다.
특히 료안지에서 목격했던 종류별로 모아 놓은 낙엽 봉지들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덕에, 우리들은 여행내내 깔끔한 교토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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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010552난젠지로 가는 길목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화려한 단풍을 기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내가 사진으로 보았던 교토의 단풍은 원색적이며 풍성하고 화사한 결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딱 한번의 기회가 있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좌표를 잘못 찍어서 살짝 어긋난 시간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교토의 단풍 절정주간은, 올해 빨리 찾아온 추위로 인해 한 주 정도 앞당겨 졌다고 한다. 예년보다 일주일정도 가을이 달아낸 셈이다. 잡으려 했던 가을이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달아난 가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꽤 근사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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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젠지, 난젠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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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칸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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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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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안지,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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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야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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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미이나리타이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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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촉촉한 가을을 기대하였는데, 아쉽게도 마지막 날만 비가 왔다.
인산인해로 휩쓸려다니던 여우신사에서는 도리이 외에 보이는 것은 우산이 전부이기도 했다.
가을의 극성수기의 교토에는 확실히 사람이 많았다.
가을의 색이 물씬 담긴 풍경을 보는 것도 근사하지만, 그곳이 한산한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벗꽃이 흐드러져 날리는 철학의 길을 눈감고 상상해 보지만, 그곳 역시 한산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색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발길 닿는대로 걷기에 교토의 거리는 무척이나 아름답다.
여름이나 겨울이라도, 한산한 거리를 평온하게 걸어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행지를 다녀와서 재방문을 확신한 것은 홋카이도가 처음이었는데, 교토 역시 가족들과 몇번을 더 와볼 것 같다.
드넓었던 홋카이도와는 다른 풍모의 교토,
그 작고 아름다운 길들을 한동안 그리워할 것이다.

가을을 잡으러 교토에 왔지만, 그것과는 다른 것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잡으려했던 가을의 이야기, 2016

Leica SL (typ601) / 24-90 Vario-elmarit-SL, asph 1:2.8-4 / kyoto,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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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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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안지역’ 에서 일행들과 함께…

이번 교토여행을 기획, 진행해주신 Starless 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함께할 즐거운 기회를 주신 일행 여러분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단체 사진에는 당연히 제가 보이지 않겠지만, 이 순간 여러분 모두의 눈동자 속에 제가 담겨있겠지요?
다시 만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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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가을의 이야기, 2016

KONICA MINOLTA DIGITAL CAMERA가을에 물든 잎사귀들이 그들에겐 소멸의 아픔이고 멍이겠지만, 인간에겐 아름다움이고 동경이다.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접근이며,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을은 풍요롭고, 가을은 아름답다.

사진기를 처음 손에 쥐었던 2001년의 여름부터, 나는 16번의 가을을 맞이하였다. 16번의 가을을 담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그러나, 내 눈으로만 가을을 마주했을 뿐, 정작 가을을 많이 담지는 못하였다.

쉬운 일이 뭐가 있겠느냐만은 ‘픙경사진’ 이란 참 어려운 종목이 아닌가 싶다.
‘풍경사진’ 의 덕목은 기다림과 반복이라고 한다. 기다림은 조급함을 버림으로서 받을 수 있는 댓가요. 반복이란, 찾아간 곳을 찾고 찾고 또 찾는 부지런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나는 그 둘다 행하지 못하였다.

바쁜 삶을 습관적으로 살아왔던 모양인지, 나는 밥한그릇을 삼키는 시간이 채 십분도 걸리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밥을 마시냐고… 몸에 배어서 그렇다. 그때는, 빨리 먹어야 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길이었다. 하긴 내인생의 습관을 좌지우지하는 경험이 고작 4년의 생활에서 굳어진 것이라니, 참 우습기 그지없다. 지금쯤이면 그런 좋지 않은 습관을 고칠 때도 된 것 같은데, 나는 끝없는 자기합리화를 반복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나는 참 성질이 급하다. 그것이 어쩔 때는 ‘부지런함’의 덕목으로 환원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급하게 서두르다 보면 종종 일을 그르칠 때가 많다.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 을 좋아하고 그 수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지만, 정작 몸은 따르지 않는 것이다.
지긋이 한 곳에서 빛을 읽고, 선을 읽고, 사람을 읽어야 하지만 그렇게 지체하는 시간이 아깝다. 아직까지는 그 시간에 더 많은 곳을 가보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나와 같이 기다림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우연적인 순간만을 갈망하며 끊임없이 표류할 뿐이다.

김영갑 선생님은 제주의 성난 파도를 담기위해 당신의 몸을 밧줄로 갯바위에 꽁꽁 묶고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갯바위의 바다낚시꾼을 하나둘씩 제 입속으로 삼켜버린다던 파도 앞에서, 그는 꿋꿋히 셔터를 눌렀던 것이다. 그쯤되면 제주를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의 시간을 제주에 쏟았고, 결국은 제주의 풍경에 있어서 누구도 쉽게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 사람의 궤적을 읽을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제주에서 그의 궤적은 여러번 덧칠된 아주 진하고 굵은 선과 면으로 표현될 것만 같다.
나는 3번 이상 어떤 공간을 가본 것이 손에 꼽는다. 물론 직장과 집 그리고 일상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렇게 해서 무슨 풍경 사진을 찍겠는가… 아니, 이렇게 해서 무슨 사진을 찍는다 하겠는가…

그러나 놀라운 것은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이 변해간다는 것이다.
가치관도 변해가고, 생각도 행동도 변해가는 것 같다. 그 방향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평가할만한 기준은 없다. 새로운 것을 찾아 헤메였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면, 지금은 뭐랄까 익숙한 시간과 장소가 좋다. 많이 돌아다니지 않더라도, 그저 한 곳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꽤나 좋다. 물론 아직까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같은 곳에서 3번 만난 가을이 있다.
도산서원과 주산지, 2번은 순전히 사진을 찍으러, 그리고 마지막 한번은 결혼전에 아내와 다녀왔다.
그래, 좋은 추억이었지… 그 시간을 증명할만한 사진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좋은 사진이 남아있을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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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CA MINOLTA DIGITAL CAMERAminolta a7d / 도산서원, 2005

주산지를 가면서 청송을 알게 되었고, 청송사과를 알게 되었다. 갈 때마다 농장을 돌며 한입씩 베어물고는 트렁크에 사과를 잔뜩 실었던 기억이 난다. 청송의 사진은 얼마 남아있지 않지만, 청송 사과에 대한 갈망은 그 풍경보다 선행하여 나에게 각인되었다. 나는 분명 사진보다 먹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사진을 소비하는 사람일까?, 생산해내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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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7-3s두번째 찾았던 주산지의 날씨는 완전히 ‘꽝’ 이었다…
앙상했던 외톨이 나무와 운무를 본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운무는 일교차가 크고 날이 어느정도 맑아야 볼 수 있기에, 그것을 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몇번을 가야 그럴듯한 주산지를 담아낼 수 있을까?
주산지의 절경을 사진을 통해 보게 되거든, 이발소 사진이라 폄하하지 마라…
풍경사진은 결코 쉬운 장르가 아니다.
취향의 차이는 존중의 관점에서 같이 바라보아야 한다.

20161117-2sBronica SQ-Ai / 주산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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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나주에서 3년간의 외톨이 생활을 했던 적이 있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미처 가보지 못했던 남도의 모습들을 참 많이 구경했었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가을이라면, 단연 정읍의 내장산이다.
내장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내소사까지 가는 길은 무척 아름답고 평온했다.
굳이 내장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내소사까지 걸어가서 사찰 한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다.
아쉬운 점이라면 내장산 인근에 숙소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른 시간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는 것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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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60651Panasonic GH1 / 내장산, 2011

가족들과 꼭 한 번 함께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 바램은 4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이날은 슬쩍 내린 비에 촉촉해진 가을의 색이 한결 더 돋보였다.
나는 이렇듯, 촉촉한 날의 물들음을 가장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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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1003398Leica M (typ240) / 내장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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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이 부담스럽다면 성동구에 위치한 서울숲도 좋은 공간이다.
한적하고 넓은 공원이다.
서울이지만 서울같지 않은 녹지…
그러나 근처에 솟은 마천루들 덕에 다시 여기가 서울임을 자각하게 된다.
처음 가본 서울숲에는 보슬비가 내렸고, 그덕에 깨끗한 공기와 진한 가을색을 담을 수 있었다.
이런 것이 이른바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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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0-0008sLeica MP / RVP50 / 서울숲,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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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을 그리워하며, 올해도 서울숲 나들이에 나섰지만 날씨도, 빛도 원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국이 망조라서 그러할까…
이럴 때는 차라리 카메라를 접어두고 산책이나 했어야하지만, 아쉬운 마음에 비싼 필름을 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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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2-0033sKonica Hexar AF / RVP50 / 서울숲,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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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가을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도 좋겠지만,
다가올 가을에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한 모습일 듯 하다.
내년의 가을은 어디서, 또 누구와 함께 맞이하게 될 것일까…
녹녹치 않은 각자의 삶속에서 이런 설레임들은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올해의 가을은 이미 지나가버린 듯하다.
그러나 조금더, 조금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아직 보내지 않은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다음주, 교토에서…
그곳에서 올해는 제대로 맞이하지 못한, 지나간 가을을 잡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