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20171124-DSC011751

올해는 교토(京都)를 가보지 못하나보다 생각했습니다. 악전고투 끝의 이직과 포르투갈로의 늦은 휴가로 일정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지간히 좋아하는 도시,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별다른 준비 없이도 훌쩍 떠나게 되는 곳, 교토로의 주말여행입니다.

20171124-DSC011881

 

20171124-DSC011891

아침일찍 도착한 간사이공항(関西国際空港)에는 예상보다 사람이 적었습니다. 단풍시즌 마지막 주인데다 금요일 아침이라 잔뜩 긴장했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아 유유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지문과 홍채 등록 프로세스를 별도로 구축한 것이 주효한 것 같았습니다. 별도 카운터를 설치하고 한국어, 중국어가 어느 정도 되는 직원들이 진행을 돕고 있었습니다. 처음 일본에 오시는 듯한 분들의 “대체 지문등록은 왜 하는거냐?”는 클레임에 씁쓸한 기분을 공유하면서 공항을 빠져나왔습니다. 여러 번 경험해도 매번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20171124-DSC011950

언제나처럼 공항리무진 왕복을 끊고 버스에 올라 오사카만(大阪湾)을 지났습니다. 주말에 비 소식이 있다고 했는데, 청명한 하늘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

20171124-DSC011951

 

20171124-DSC012031

멀리 교토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낮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한적한 풍경은 볼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길을 너무 좋아하게 되어서 오사카-교토 간 전철은 영영 타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20171124-DSC012241

지난번 방문 때 이세탄(伊勢丹)백화점의 라멘골목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늘 가던 스미레(すみれ) 교토점이 없어졌으니 새로운 라멘집을 찾아갔습니다. 트립어드바이저 라멘 부문 2위, 음식점 전체로는 25위를 차지한 혼케 다이치아사히 다카하시(本家 第一旭 たかばし)입니다.

20171124-DSC012440

교토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가게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잠깐 세어보니 55명이었습니다. 허허. 이걸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가, 기왕 이렇게 된 것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20171124-DSC012441

면을 납품하는 아저씨의 바쁜 모습을 구경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한 시간 남짓,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가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20171124-DSC012581

일본에 오면 받는 인상 중 하나는, 작은 가게, 큰 가게를 떠나 대부분의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무척 열심히 일한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곳 역시 그랬습니다. 바쁜 스탭들의 모습이 음식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줬습니다.

20171124-DSC012651

 

20171124-DSC012661

군만두와 특제라멘을 주문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꽤 괜찮은 라멘집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푹 우려낸 돼지뼈 육수에 두 종류의 차슈와 신선한 파를 푸짐하게 얹어서 내주는 라멘은, 보통의 일본 라멘보다 덜 짜고 덜 느끼했습니다. 가게에 외국인이 많은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메뉴에서 한, 중, 일 3개국의 흔적이 느껴지는 점이었습니다. 군만두는 중국식으로 한쪽만을 바삭하게 구워서 내주고, 사이드 메뉴에는 김치가 있었습니다. 옆 테이블에서 주문한 걸 보니 한국식이었습니다. 공기밥도 주문할 수 있는데, 라멘만 주문하면 주지 않던 쓰케모노(漬物)를 함께 내줬습니다. 라멘은 전통 방식을 고수하면서, 다양한 메뉴를 통해 다양성을 추구하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마시고 가게를 떠났습니다.

20171124-DSC012741

기요미즈데라(清水寺)에서 가까운 숙소는 일본식 가옥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였습니다. 짐만 내려놓고 저녁을 보내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20171124-DSC012771

버스를 타고 데라마치도리(寺町通り)로 향했습니다. 아직도 맛보지 못한 교토규(京都牛) 스테이크집 하푸(Hafuu)에서 저녁을 먹고, 부탁받은 차를 사러 잇포도차호(一保堂茶舗) 교토 본점에도 들르기 위해서였습니다.

20171124-DSC012772

 

20171124-DSC012981

 

20171124-DSC013121

오픈 시간에 맞춰 갔지만, 하푸는 예약이 모두 차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예약받은 손님들에게 음식을 내고 더 이상은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가게를 떠났습니다.

20171124-DSC013091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잇포도차호를 찾아갔습니다. 1717년 영업을 시작했다는 차 명문가는 외관에서부터 만만치 않은 내공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차를 시향하거나 마실 수 있고, 체험도 할 수 있는 매장 안에서 차향에 취해 머물렀습니다.

20171124-DSC013051

 

20171124-DSC013031

부탁받은 차와 두 종류의 티백을 구입하고 점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습니다.

20171124-DSC013122

이웃 가게의 시바를 쓰다듬어주고 가와라마치(河原町) 방향으로 길을 걸어내려갔습니다. 양쪽으로, 고풍스럽고 세련된 상점들이 자꾸만 발걸음을 붙잡았습니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시간을 내서 산책하러 와도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20171124-DSC013101

 

20171124-DSC013111

 

20171124-DSC013131

가미지카키모토(紙司柿本)에 잠시 들렀습니다. 가미지라니, 자부심 가득한 이름답게 가게 안은 온갖 종류의 종이와 공예품들로 가득차있었습니다.

20171124-DSC013151

두 종류의 카드를 구입하고 길을 재촉했습니다.

20171124-DSC013191

 

20171124-DSC013201

 

20171124-DSC013211

 

20171124-DSC013221

 

20171124-DSC013231

 

20171124-DSC013241

 

20171124-DSC013251

 

20171124-DSC013291

 

20171124-DSC013341

사랑해 마지않는 앙제르(ANGERS)에 도착했습니다. 일년만에 찾은 매장에는 여전히 세련되고 흥미로운 물건들이 가득했습니다.

1층에서 신형 융한스(Junghans)의 블랙 페이스와 70년대 펠리컨(Pelikan)에 정신을 뺏겼다, 2층에서는 요모우또오하나(羊毛とおはな)의 음악을 들으며 매대 사이를 걸어다녔습니다. 브래디(Brady)의 꽃모양 파우치를 들여다보다,  3층의 무민(Muumi) 한정판 식기 세트를 한참 노려보고 나서야 가게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위험한 방문이었습니다.

20171124-DSC013301

메리 크리스마스! 쇼윈도의 순록 모형에 손을 흔들고 산조(三条)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20171124-DSC013402

 

20171124-DSC013401

오늘도 무척이나 바쁘군, 스시노무사시(寿しのむさし 三条本店)의 도시락을 잠깐 구경하고,

20171124-DSC013361

두번째 헌책방을 흘낏 들여다보고,

20171124-DSC013411

파르페(Parfait)전문점의 모형을 신기하게 쳐다보다,

20171124-DSC013461

기온시조(祇園四条)로 향했습니다.

20171124-DSC013561

가모가와(鴨川)를 따라 늘어선 가시와야초(柏屋町)의 음식점들에는 오늘도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한번쯤은 저곳에서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엄청 취하겠지만 말입니다.

20171124-DSC013531

 

20171124-DSC013571

횡단보도를 건너 기온(祇園)거리로 들어섰습니다.

20171124-DSC013581

 

20171124-DSC013611

가게들의 불빛 사이를 걸어 이즈우(いづう)에 도착했습니다. 교토에서는 아무래도 이요마타(伊豫又)지만, 한번 쯤은 사바스시(鯖寿司)로 이름 높은 이곳에 와보고 싶었습니다.

1781년 열었다는 가게는 작고 정갈했습니다. 무엇보다, 식당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조용하고 품격있는 공간이 묘한 기분이 들게 했습니다.

20171124-DSC013661

 

20171124-DSC013671

 

20171124-DSC013641

 

20171124-DSC013761

이요마타(400년)보다 업력이 짧다(236년)고는 하나, 그 세월이 결코 만만치 않겠습니다. 둥글게 말린 다시마를 벗겨내고 맛을 보니, 과연, 적어도 사바스시로는 이요마타보다 한 수 위라고 느껴졌습니다. 기온마쯔리(祇園祭)의 공식 지정 도시락이라는 설명도 납득이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가끔은 들러야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71124-DSC013701

 

20171124-DSC013711

사바스시 외에도 도미와 여러 종류의 초밥을 맛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20171124-DSC013821

화장실로 가는 길에는 작은 정원이 꾸며져있었습니다. 확실히 이요마타와는 방향이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20171124-DSC013851

 

20171124-DSC013931

 

20171124-DSC013911

 

20171124-DSC013941

저녁도 먹었겠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기다란 줄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당고를 사기 위한 줄이었습니다. 눈 짐작으로 대략 30명 쯤,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무슨 당고길래 이런 줄이?

20171124-DSC014011

 

20171124-DSC014041

30분 넘게 줄을 서서 받은 당고는 기다린 보람이 있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떡을 숯불에 구워 콩가루를 듬뿍 뿌린 뒤, 말린 바나나잎에 조청과 함께 싸주셨습니다. 뭔 당고를 이렇게까지, 싶으면서도 과연 일본인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작 110엔의 당고지만, 그 정성에 살짝 감동까지 느꼈습니다.

20171124-DSC013871

길거리의 산타 장식을 올려다보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 to be continued

 

광고

추억이여 안녕한가

20161125-_d5k8245-%ed%8e%b8%ec%a7%911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를 사랑하는 일은 깊은 물 속에 잠겨있는 일과 같아서
점점 어두워지고 마음에는 한없이 시퍼런 멍이 든다고 말하던 당신.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때 당신은 처음으로 내게 진실을 이야기했고
그 진실의 무게로 힘겨운 나를 두고 떠났다.

20161125-_d5k8277-%ed%8e%b8%ec%a7%911

20161125-_d5k8223-%ed%8e%b8%ec%a7%911

20161125-_d5k8280-%ed%8e%b8%ec%a7%911

20161125-_d5k8306-%ed%8e%b8%ec%a7%911

20161125-_d5k8309-%ed%8e%b8%ec%a7%911

영원한 이별은 아니리라 믿었지만 그것은 실제로 영원한 이별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더 해야할 말이 있었다.
그것을 하지 않은 채 떠나가버렸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20161125-_d5k8315-%ed%8e%b8%ec%a7%911

20161125-_d5k8355-%ed%8e%b8%ec%a7%911

20161125-_d5k8338-%ed%8e%b8%ec%a7%910

나는 지금 낡은 추억들이 먼지를 켜켜이 뒤집어쓰고 쌓여 있을 <잃어버린 기억들의 창고> 앞에 서 있다. 먼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낮이면 오래 걸었고 밤이면 깊은 잠을 잤다. 달은 몇번이나 제 모습을 바꾸었다. 달의 변덕을 참아가며,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누군가가 잠시 나의 동행이 되어주기도 했다. 우리는 참 쉽게도 사랑에 빠졌고, 다음 순간 끝없이 서로을 의심했으며, 곧 헤어졌다. 그 지겨운 되풀이를 참아가며, 나는 걸었다. 그리고 이제 이 문 앞에 서 있다.
문을 열면, 긴긴 잠에 빠진 낡은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기억들은 더 많은 나이를 먹고 추억이 된다.
그리고 추억들은 하나의 마을을 이루기도 한다.

20161125-_d5k8365-%ed%8e%b8%ec%a7%911

20161125-_d5k8375-%ed%8e%b8%ec%a7%911

20161125-_d5k8396-%ed%8e%b8%ec%a7%911

20161125-_d5k8409-%ed%8e%b8%ec%a7%911

20161125-_d5k8416-%ed%8e%b8%ec%a7%911

추억이여 안녕한가
깊은 물 속에 잠겨있는 당신, 안녕한가

20161125-_d5k8419-%ed%8e%b8%ec%a7%911

20161125-_d5k8470-%ed%8e%b8%ec%a7%911

기억은 어느 부분에서 멈추었다가, 한 번 튀고 다시 돌아간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있는 것은 내가 잃어버린 그녀.

20161125-_d5k8493-%ed%8e%b8%ec%a7%911

20161125-_d5k8501-%ed%8e%b8%ec%a7%911

20161125-_d5k8507-%ed%8e%b8%ec%a7%911

20161125-_d5k8549-%ed%8e%b8%ec%a7%914

20161125-_d5k8550-%ed%8e%b8%ec%a7%911

오래지 않아 그 추억은 바닥날 것이다
한줌도 안되는 알갱이에 먼지만 자욱하여
그것으로 내눈이 멀고
두세번 서성대는 것
어느 누가 먼지를 털고 낡은
추억의 끝에 마침표를 찍지 않더라도
스스로 닳아지는 모든 피조물과 같은것
이제 나는 낯익은 먼지 속에서 콜록거리며
마침표를 찍으러  간다
돌아보지 않도록
떠날 수 없도록
적어도 추억으로는
추억이라도

20161125-_d5k8609-%ed%8e%b8%ec%a7%911

살아온 날이 너무 많아 내 속에서 추억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제의 일도 먼 과거가 내일로 옮겨다니며
서로의 어둠을 잡아먹고 살더니

20161125-_d5k8649-%ed%8e%b8%ec%a7%911

20161125-_d5k8656-%ed%8e%b8%ec%a7%911

20161126-_d5k8701-%ed%8e%b8%ec%a7%911

날이 바뀌어도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고 언젠가 한번 만났던 사람
언젠가 한번 보았던 곳에서 언젠가 했던 말을 하며
그 조합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멀리서 지켜보는 또 하나의 나

20161125-_d5k8685-%ed%8e%b8%ec%a7%911

이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까?조차도 눈앞에 보여

이미 너무 많은 삶을 알아 그 삶을 모조리 읽어내고 암기하고 있어,
나는 너를 모두 알고 그래서 떠나고 마치 한권의 소설을 읽고 던져버리듯이

20161126-_d5k8761-%ed%8e%b8%ec%a7%911

추억은 더이상 나를 울리지 못해 바라건대 제발 너의 자리로 돌아가
아주 먼 옛날처럼 가슴 깊이 묻혀 다시는 지상으로 나오지 말고

20161126-_d5k8780-%ed%8e%b8%ec%a7%911

20161126-_d5k8786-%ed%8e%b8%ec%a7%911

안녕하길, 지상에서 단 한번 있었던 나의 사랑이여

20161126-_d5k8795-%ed%8e%b8%ec%a7%911

20161126-_d5k8810-%ed%8e%b8%ec%a7%911

20161126-_d5k8813-%ed%8e%b8%ec%a7%911

20161126-_d5k8881-%ed%8e%b8%ec%a7%911

20161126-_d5k8888-%ed%8e%b8%ec%a7%911

20161126-_d5k8904-%ed%8e%b8%ec%a7%911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될 줄 몰랐다.
흐린 먼지들이 공중을 떠돌다가 가만히 내려 앉는다.
나는 눈을 비비며 추억을 잊지 않으려고 눈물을 참는다.
이렇게 오래 참아야 하는 건지 몰랐다.
처음 너를 만나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너를 위한 빈 자리 하나 만들던 그때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간다. 알고 있다.
추억들은 눈물에 씻겨 간다. 아직은 참을 수 있다.
너, 한번도 앉지 않은 빈자리에 말간 햇살들이 잠시 머물다 간다.

20161126-_d5k8951-%ed%8e%b8%ec%a7%911

20161126-_d5k8971-%ed%8e%b8%ec%a7%911

혹시 스쳐가는 이들의 즐거운 발자국 소리가 너를 깨워도
눈뜨지마라, 다시는 지상으로 오르지 마라
투명한 나의 눈물이 너의 마음을 두드려도
믿지마라, 그날 너를 남겨둔 채 내가 서둘러 밖으로 나왔을때
나는 너를 버렸다. 내사랑

20161126-_d5k9013-%ed%8e%b8%ec%a7%912

20161126-_d5k9020-%ed%8e%b8%ec%a7%911

우리는 서로 깊이 사랑했고 많은 날들을 사랑에 잠겨 보냈다.
당신은 무척 행복했지만 나는 밤마다 당신이 떠나는 꿈을 꾸었다.
시간은 흐르고 당신은 나로 인해 가끔 불행했다.
어느날 당신은 내 손을 잡고 당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의 눈이 자꾸만 그것을 생각나게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잊고 있었던 것을 찾기 위해 혹은 잊고 있었던 것을
영원히 잊기 위해 떠나는 길을 막지 못했다.
당신이 잊고 있는 것이 나의 사랑이라고 끝내 말하지 못했다.

20161126-_d5k9020-%ed%8e%b8%ec%a7%914

이 세상에서의 사랑이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눈 앞의 풍경들이 바뀌고 모든 일상이 변화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낯선 선택을 강요받고, 그 선택에 따라 세계는 어느 한쪽으로만 열린다. 당신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길을 가르쳐주는 지도도 없다. 가슴은 쉬지않고 뛰고 기쁨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그런 여행이란,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언젠가 끝이 난다. 여행이 끝나면 피로함과 추억만 남는다. 사랑은 그렇게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떠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느 순간 또다시 짐을 꾸리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0161126-_d5k9082-%ed%8e%b8%ec%a7%911

20161126-_d5k9092-%ed%8e%b8%ec%a7%911

20161126-_d5k9099-%ed%8e%b8%ec%a7%911

20161126-_d5k9103-%ed%8e%b8%ec%a7%911

20161126-_d5k9106-%ed%8e%b8%ec%a7%911

세상에 흘러다니는 사람들도 저마다 나름대로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당신과 전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흘러들어와서 어느 날 훌쩍, 미처 짐을 꾸리지도 못한 나를 끌고 여행길에 올랐다가, 다시 어느 날 갑자기 제 마음대로 떠나가버린다.

기억하라. 사랑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

20161126-_d5k9125-%ed%8e%b8%ec%a7%911

20161126-_d5k9129-%ed%8e%b8%ec%a7%911

사랑은 축제 같은 것. 어느날 우연히 이루어진 소풍과 같은 것. 한껏 흥이 올랐다가 저절로 사라져버린다. 사라지고 나면 그것으로 그 뿐. 처음부터 사랑은 그렇게 사람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도 그런 류의 사랑은 그런대로 견딜만 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면, 얼마든지 복종할 마음도 있다.

20161126-_d5k9157-%ed%8e%b8%ec%a7%911

20161126-_d5k9167-%ed%8e%b8%ec%a7%911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가을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서 나무들은 그들의 잎을 하나도 남김없이 떨어뜨렸다. 지금 당장 하늘에서 펑펑. 흰 눈송이들이 쏟아져 내린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십일월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몸속 깊은 곳에서 바스락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색깔을 잃고 향기를 잃고 물기를 전부 잃어버린 채 하릴없이 땅에 떨어진 낙엽처럼 쓸쓸했다. 내 팔에 매달려 있는 두 손은 어느 순간 바삭, 하고 부서질 것 같았다.
나는 교정의 잔디밭에 엎드려 릴케를 읽고 있었다.
여섯시가 조금 넘었고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는가. 글씨들이 흐려 보이더니 릴케의 시집 위로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방울이 <두이노의 비가>를 적시고. 바삭바삭하게 말라 있는 내 손을 적시고. 마지막으로 나의 온 몸을 적실 때까지. 나는 잔디밭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이대로 비를 맞다가 잠이 들어버릴 수는 없을까. 잠이 들어 그대로 이 세상을 떠나버릴 수는 없을까. 그래서 어디 먼 바다 깊은 곳에 물고기가 되어 다시 태어날 수는 없을까. 나는 비에 젖은 채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다를 택할 수 있다면. 그래. 따뜻한 바다가 좋을 거야. 나는 열대어가 되는 것이 좋을 꺼야. 푸른 줄무늬가 딱 하나만 들어간 작은 오렌지색 열대어. 부드러운 해초 속에서 잠을 자고 아름다운 산호숲에서 놀아야지. 사랑도 해야지.
아주아주 단순한 사랑.

20161127-_d5k9380-%ed%8e%b8%ec%a7%911

20161127-_d5k9383-%ed%8e%b8%ec%a7%911

인생은 그런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상실되어 있다.
상실된 부분이 채워지는 순간, 그 나머지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20161127-_d5k9413-%ed%8e%b8%ec%a7%911

유령 같은 사랑.

20161127-_d5k9424-%ed%8e%b8%ec%a7%911

당신은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렇게 유령 같은 사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없는 죽음 같은 사랑. 나는 사랑을 하였지만 그것은 나의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은 희미하게 내 주위를 떠돌고 있었을 뿐. 나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것을 지켜볼 수만 있었다.

20161127-_d5k9481-%ed%8e%b8%ec%a7%911

당신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나는 사랑 속에 빠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한 걸음 혹은 그 이상을 떨어져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것은 마치 사랑이 아닌 것처럼 내눈에 비쳐졌다.
나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마음으로 나의 사랑이 제멋대로 놀아나는 것을 보았다. 제발 그러지 말아라. 내가 아무리 빌어도 그것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생명으로 충만한 사랑이 아니었기 떄문에 나는 그것이 얼마 못 가 힘을 다하고 사라지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심심한 일상으로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유령 같은 나의 사랑은 그것조차 허락해주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밤이 되면, 나는 때떄로 그것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제 끝을 내!
그러나 그것은 잔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끝을 낼 수는 없어. 처음부터 시작이 없었으니까.

20161127-_d5k9579-%ed%8e%b8%ec%a7%911

20161127-_d5k9613-%ed%8e%b8%ec%a7%911

나는 출구가 없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다

20161127-_d5k9556-%ed%8e%b8%ec%a7%911

먼 세월 흘러 너를 우연히 다시 만나니..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너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러니 우리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겠구나
사랑을 하여도 금세 이별이겠구나
수천번의 봄이 되풀이 되고 수억의 꽃봉오리 피고져도
내가 있는 풍경 속에서 너도 늘 그렇게 슬픈거구나

먼 세월이 흘러 너를 우연히 다시 만나니..
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너는 변하였구나
그러니 우리처음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거구나
갈기갈기 찢어진 그리움을 너도 이제 모르는구나
수천번 네 이름을 부르며 그토록 긴 시간을 통과했는데
나없이 너도 혼자 이렇게 아름다워졌구나

20161127-_d5k9548-%ed%8e%b8%ec%a7%911

당신이 나의 추억들을 가지고 갔다. 당신이 나의 꿈을 가지고 갔다. 당신이 나의 운명을 가지고 갔다. 당신이 나의 별들과 달과 해를 가지고 갔다. 당신이 나의 무지개와 나의 꽃들과 나의 바다를 가지고 갔다. 당신이 나의 자유를 가지고 갔다. 당신이 나의 사랑을 가지고 갔다. 한번도 나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20161126-_d5k9195-%ed%8e%b8%ec%a7%911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이 슬픔도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결국 내가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던 것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었던 것이 될 것이다.

황경신,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2016년 가을, 교토京都 | D5 | Analog Efex Pro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