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 자유부남

목요 자유부남

어제 목요일 급 하루 휴가가 생겨서 여기저기 좀 쏘다녔습니다.

우선 아침에 간단하게 두유 한잔 원샷하고 피사장님 계시는 대구로 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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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뵈었지만 형님은 여전히 그 미소 그대로 저를 맞이해 주십니다.

밥부터 먹자며 저를 끌고간 곳은 정말 “할매”가 해주시는 추어탕집이였습니다.
저희 집안은 안동이 고향입니다.
그래서 경북음식이 너무 반가웠습니다.
할매가 내주신 맑은 국물의 추어탕도 넘나 맛났지만
곁가지로 나온 겉절이가 얼마나 맛나던지,
보기엔 참 간단해 보이는데 이게 왜 부산서는 그 맛이 안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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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르게 밥 잘 먹고 인근 다원으로 들어 갔습니다.
들어서기 전에 형님께서 여긴 뭐 내가 오히려 가르쳐주는 그런 곳이야라고 말씀하실땐
뭔가 일반인은 알수 없는 포스가 느껴졌습니다.
역시 대구 이곳은 그의 나와바리인 겁니다.
보이차와 귤(?)을 15년 이상 말린 차를 우려 주셨는데
차 맛이 이렇게 오묘하고 깊고
담는 용기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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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너무 많이 마셔 화장실 들렀다 바로 대구의 필름 성지 솔리스트로 향했습니다.
예전부터 형님께 대구 가면 꼭 솔리스트에 한번 데려다 달라고 조르곤 했었는데 드디어 제가 갑니다.
그렇게 만나뵌 솔리스트 선생님은 너무나 반듯하고 깔끔하셨습니다.
그 성향 그대로 흑백인화물들도 얼마나 정직하고 깔끔하게 뽑아내시는지
저는 그런 성향이 참 좋았지만 약간 깔롱한걸 좋아하시는 울 피형님은
좀 더 양념을 쳐주면 좋겠다고 의견을 몰래 저한테만 주셨습니다.
제가 본 솔리스트는 네가인화의 정점에 다달은 현상소였습니다.
샘플로 몇장 본 수작업 네가 인화의 사진들이 어쩜 그렇게도 이쁜지
톤과 느낌이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늘 흑백만 다루어 왔었는데 이번을 계기로 네가로도 좀 찍고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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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울 설계자 동생이 열심히 뺑이치고 있는 건천으로 찾아갔습니다.
네비의 목적지인 건천읍사무소에 도착해서 보니 여긴 어디? 나는 어쩌다?
결국 내가 진짜 건천까지 오고야 말았구나.

조금 기다리니 울 피요동생이 일에 찌든 얼굴이지만 공장에서 탈출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저를 맞아줍니다.
언제나 늘 그렇듯이 갈비뼈 부서지게 부둥켜 안고 먼저 말을 꺼냅니다.
행님 소고기 무글래요? 잡어매운탕 무글래요?
도시에선 흔히 먹기 힘든 민물매운탕을 먹기로 하고 건천 최고 맛집 현일식당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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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로컬맛집은 다릅니다.
저녁 시간에 이 외딴 곳에 사람들이 꽉 찹니다.
딱 안동에 어른들이랑 형님들이 해 먹던 그 맛입니다.
민물매운탕 몇숟가락 떠먹으니 울 아버지가 참 좋아하시는데 하는 생각이 납니다.

저녁 배불리 먹고 추위도 피하고 담소도 더 나눌겸 커피 한잔 마실려고 하니
어설픈 건천표 아메리카노 보단 이번 기회에 같이 지역 다방으로 한번 가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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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 다방 아가씨를 기대하며 들어선 우리의 선택지 백조다방엔
불행히도 아가씨는 없었습니다.ㅠㅠ
쌍화차랑 말 그대로 다방커피를 한잔씩하며 새로 장착했다고 하는 orako를 들여다 봅니다.
역시 설계자는 틈을 주지 않습니다.

다시 야근하러 들어가는 동생을 뒤로하고 차의 방향을 퐝으로 돌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뿡회장을 만나고 가야 오늘의 마무리가 되는거죠.
퐝 공식 만남의 장소 파스쿠찌 지곡점에서 조인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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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도착해서 차를 마시고 있으니 저쪽에서 자이즈이콘 슈퍼이콘타를 한손에 달랑 달랑 들고 나타납니다.
이 밤에 꼭 제 초상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서 감도 800으로 세팅해서 들고 왔다기에
오늘 하루의 무리한 일정으로 피로가 겹겹이 쌓인 얼굴을 한 저는
눈 밑이 아니라 턱 밑까지 내려온 저것은 분명…다크서클인가? 아닌가?
하지만 기꺼이 쾡한 모델이 되어 줍니다.
우리 둘의 나이차이는 조금 있지만 아이들은 같은 나이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막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피요를 굳이 파스쿠찌로 불러들입니다. ㅋㅋㅋ
마지막까지 퐝 커피숖 구탱이에서 건너편 테이블의 아줌시들이 보던말던
카메라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성인 남자 세명이서 이렇게 저렇게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서로의 다이나믹했던 하루를 마감합니다.

그렇게 새벽에 고잉홈을 하고 쓰러지듯 잠이든
부산->대구->건천->포항->부산
단 하루 자유 유부남의 목요일 일기 끝

p.s.
올려진 모든 사진은 아이폰 5s로 담은 것들입니다.
담번엔 다른 지역구 횐님들도 투어로 꼭 한번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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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정산_’17년을 마무리하며

* 피사장님의 역점사업인 ‘응답하라 2017_12달의 기억’ 참가용 포스팅입니다.

 

병신년이 가고 맞이한 2017년은 분명 특별한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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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을 직접 목격했고, 같은 달 1000일 이상 차가운 물 속에 잠겼던 세월호가 인양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부카니스탄에서 연이어 미사일을 쏘아대니 미일러중 사이에서 우리나라는 골머리가 썩는 모양새구요. 비록 타의에 반으로 갈라섰지만 남과 북은 각자 악으로 깡으로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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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세계적 담론을 계속 이어갈 깜냥은 애당초 없으니, 이즈음에서 개인사로 넘어가보면 무엇보다 B급 매거진이 떠오릅니다. 게다가 피사장님께서 연말정산용 판을 손수 깔아주시니 응답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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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10일 첫 포스팅을 개시한 후 12월 현재 총 24개의 글을 등록했네요. 얼추 격주 단위가 되는데요.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것은 ‘21세기 필름입문자를 위한 안내서’가 472회로 가장 높았고, 가장 많은 코멘트가 달린 포스트는 28개의 덧글이 달린 ‘아빠 카메라’라는 글이었습니다. 각각의 글 특성상 그럴 수 있겠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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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을 보름 남짓 남긴 시점에서 올 초부터 매거진에 게재했던 포스트들을 한번 돌아보고, 1월부터 12월까지 한 달에 하나씩 대표 포스팅을 골라 커버 사진과 함께 간단한 코멘트를 곁들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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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New year wat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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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일 포항 왕룡사입니다. 집에서 차로 15분거리라 매년 신년일출을 보는 곳입니다. 다만 올해는 삼각대와 망원렌즈 대신 필름카메라와 35미리 단초점 렌즈를 들었습니다. 모두가 일출을 볼 때 반대방향으로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충분히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포스팅 날짜로 치면 3월에 들어가야 맞지만 1월을 비워두기도 뭐하고 사진 자체는 또 1월에 촬영한 것이 맞기에 우격다짐으로 여기에 낑굽니다. 제목은 엘리엇 어윗의 Museum watching에서 착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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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필름 그리고 라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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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매거진 데뷔 글입니다. 생짜로 새로 쓴 글은 아니었지만 개발새발 망작들에도 열렬히 환영해주신 덕분에 곧이어 가고시마어시장, 이부스키로 이어지는 망작들을 꿋꿋하게 올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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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아빠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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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내미와 생애 첫 콜라보입니다. 말하자면 “그 아들 촬영 그 아빠 보정” 정도가 되겠네요. 당시의 빅픽쳐로는 이번 여행을 계기로 사진과 장비에 취미를 붙여 아빠랑 출사도 다니고 곧이어 엄마 승인 하에 신품도 막 같이 까고 그럴라고 했는데, 녀석이 사진을 찍는 건 이때가 마지막이 되어버렸네요. 쥬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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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심도깊은사진에관한심도얕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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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빨이 좀 섰던 포스팅입니다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거장들의 사진에 이어 붙어 있는 제 사진들은 죄다 오징어네요. 오징어가 아주 풍년입니다 풍년.

5월 – 21세기 필름입문자를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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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3개월차에 욕심을 좀 내보았습니다. 필름으로의 회귀가 아닌 역행자로서의 관점으로 한번 들여다본 것입니다. 모쪼록 제 글이 중고 필카 가격방어에 일조하길 바래봅니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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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호모 에렉투스 그리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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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그리고 라이카”라는 제목 포맷을 계속 이어봅니다. 전적으로 매거진을 목적으로 촬영한 첫 결과이기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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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흑백사진 그리고 실버에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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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개인 블로그에다 7편으로 나눠 연재했던 실버에펙스 사용법을 한데 묶어본 것입니다. 포스팅 아래 붙은 피사장님 덧글에 대한 답글처럼 매거진에 포진하고 계신 거장들 모셔두고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하는 형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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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사구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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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들어간 사진에 지칠 때쯤 방문한 돗토리 사구는 제게 일종의 치유의 공간이었습니다. 웅장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말 한 마디는 수천만년 쓸리고 쌓이는 모래와 다르지 않았고, 감광층에 한 컷씩 퇴적되는 흑백의 풍경들은 그야말로 자기치유의 경험이었습니다. 바다와 산 그리고 사막이 한데 어우러진 진풍경이 궁금하시다면 꼭 한번 들러보시길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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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우에다쇼지사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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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 출신의 세계적 사진작가 우에다 쇼지. 건축가 다카마스 신이 ‘소녀사태’를 모티브로 하여 다이센산 기슭에 마련해 준 보석같은 공간 속에서 쇼지의 작품들은 더욱 빛을 발하는 듯 했습니다. 과연 예술적 영혼이 담긴 마스터피스는 비록 담긴 그릇이 다르더라도 서로 소통하고 작용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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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마카오스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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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태양 아래 스냅에 올인했던 5일 간의 여행이었습니다. 다른 언어, 다른 문화라지만, 사람 사는 거리는 사람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는 법입니다. 뷰파인더를 통해 본 그곳의 거리는 포항송도의 거리 구룡포의 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쌓여 있지만 지극히 외로운 사람들.. 그들의 표정은 곧 나의 표정이었음을 이내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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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은퇴 그리고 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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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은 참 어렵습니다. 너무 가깝기에 곁에 있는 줄 모르고 너무 사랑하기에 그것이 사랑인 줄 모르는.. 그래서 의식적으로 셔터를 눌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젊은 시절을 단 하루라도 무심히 흘려 보내지 않기 위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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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KODAK PORTRA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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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선물 받은 포트라 400 두 롤 가지고 풀어본 이야기입니다. 컬러필름을 흑백사진처럼 찍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괜히 쌩돈 날리지 말고 흑백쓰자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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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텍터 피요님 권유로 시작할 당시엔 5편 정도 쓰고 나면 더 이상 쓸 거리가 없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도 이왕 하는거 10개는 채워야겠다는 야심을 품고 필진으로 참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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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정기 포스팅에 대한 의무감과 함께 때로는 오히려 매거진 포스팅을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필진으로 활동하는 일이 결론적으론 목표 없이 부유하는 사진생활보다는 좀 더 계획적인 생활로 유도하고 사진 자체에 대한 흥미와 동기부여를 유지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B급 매거진은 “사진과 글에 대한 습작의 공간으로서” 그리고 “개성 있는 필진들의 수작들을 정기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그 의미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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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매거진 아래 필진 리스트에서 제 이름을 클릭해 보곤 합니다. 워드프레스 특유의 동적 레이아웃으로 펼쳐지는 포스팅 리스트를 보고 있으면 못 먹어도 배부른 느낌이 드네요.
내년 이맘때 펼쳐질 제 포스팅 리스트에는 과연 어떤 사진들과 이야기들이 올라와 있을지 내심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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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족 여러분,

1년 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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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송도

사실 창고가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은 ‘서재’라고 부르고 싶은 내 방 책꽂이 한 켠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안에는 수백롤의 필름이 차곡차곡 담겨져 있는데 여기저기 널려있는 필름들을 보다 못한 와이프가 넣어준 것들이다. 내 저것들을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텐데 하며 가끔 노려보기도 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 만다.

‘에이, 나중에 하자.’

그러다 지난 금요일밤 괜히 한번 상자를 열어봤다. 마구잡이로 섞인 필름들을 천장의 형광등에 비추어보며 간만에 추억에 젖다가 송도 해수욕장을 촬영한 필름 하나를 발견했다. 36컷을 모두 살펴봐도 그 필름에서 기억나는 이미지는 단 한 컷도 없었다. 메모조차 해두지 않아 언제 찍은 건지도 알 수 없는 필름 속 이미지들은 전혀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빠듯한 용돈 사정으로 인해 인화지 한 장이 아쉬웠다. 그래서 굳이 ‘불필요한’ 밀착 인화는 생략했고 확대 인화 역시 한 롤에서 고르고 고른 몇 컷 외에는 하지 않았다. 이 버릇은 나중에도 그대로 이어져 스캔할 때도 한 롤 전체를 긁지 않고 네가티브를 비추어 보고 괜찮다 싶은 몇 컷만 추려 스캔을 해왔기에 네가티브를 보다가 새롭게 눈에 띄는 컷이 있는 경우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한 롤에서 한 컷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아도 이 건 단 한 컷도 스캔하지 않은채 쳐박힌 필름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도대체 이 필름은 왜 버림받았을까? 일단 한롤을 채로 긁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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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의 뒷골목 입구에서 부터 내 발걸음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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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사장의 유실로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송도 해변의 회생을 포기하고 해안 도로가 건설되던 때의 막바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산책로는 거의 다 되었고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던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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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평화의 여신상이 있는 광장 해안 축대 옆의 테트라포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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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산책로에는 아직 모래가 많이 남아 있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아이들이 두꺼운 차림에 장갑까지 끼고 있는 걸 보니 제법 추운 날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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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억은 이미지와 글에 얼마나 의존적인가. 21미리로 강아지를 이렇게 가까이서 찍었을 정도면 기억이 날 법도 한데, 현상 후 스캔조차 하지 않았던 탓에 이날 촬영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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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해변 일주도로 건설을 맡았던 청구 건설의 현장 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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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해변 방파제 위에는 허름하고 어설픈 포장마차촌이 있었다. 송도 해수욕장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이 곳도 사라졌다. 당연히 무허가 불법이었을테고 태풍이라도 오는 날엔 위험하기 그지 없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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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의 수상가옥 마냥 방파제 한 귀퉁에 의지하여 바다 위에 자리 잡았던 포장마차들. 자리에 앉으면 판자로 만든 바닥과 천막 틈 사이로 파도가 출렁였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들으며 회 한 접시에 소주를 마시고 모래사장에 세워둔 차에서 눈을 붙히고 아침에 바로 출근했던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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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을 뒤집어 씌웠던 철골과 계단의 녹물이 방파제 바닥 곳곳을 붉게 물들였던 것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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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내린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는 손길들. 포장마차가 사라진 지금, 더이상 배들은 이 곳에 접안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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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왼쪽의 풍경. 송도 해변과 포항 구항이 멀리 보인다. 늘상 보는 장면이라 새롭지 않지만 이곳이 동해안에 몇 없는 지형인 영일만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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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과다현상이 되어 콘트라스트가 강한 네가티브가 되었다. 암부가 많이 죽었음이 느껴진다만 평소 사진의 톤에 비해 칼칼한 것이 또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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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에서 굿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인가, 요즘은 송도에서 굿하는 장면을 거의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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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버린 방파제 위 풍경과 달리 송도의 퇴락한 뒷골목은 이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골목 사이를 누비면서 정적인 사진에 동감을 불어 넣고자 누군가 지나가기를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래본들 무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사진이 되겠나 싶다.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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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나뭇가지가 낡은 하얀 벽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흑백인데도 차갑고 투명한 겨울 공기가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려오는 걸 보니 늙은 듯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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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덕분에 이 필름이 언제 찍은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8년전의 블로그 포스팅에는 Nikon D700으로 같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이 날 찍은 파일은 모두 지워 버렸다는 내용이 있었다. 찍은 사진도 맘에 안들고 앞으로 어떤 사진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유와 함께. 아마 그래서 이 날 찍은 필름도 스캔조차 하지 않고 던져뒀던 듯 싶다.

 

 

8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날 느꼈던 회의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뭘 찍어야 하고 뭘 표현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찍어야 하는가. 아니 그런 것에 답은 있는가. 답을 찾을 필요는 또 있는 것인가. 여전히 머리 속은 복잡하지만 이렇게 출토된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사진들이라도 시간의 무게가 더해지니 기록으로라도 가치가 있겠다 싶으니 그건 또 다행이라 해야하나. 아직도 모르겠다.

 

 

2009.12.26. 포항 송도

Contax IIa / Carl Zeiss Biogon 21mm f4.5 / Kodak 400TX / IVED

무전기행, 경주 #1

경주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면 최근에 봤던 영화 “경주”가 있고, 그 이전에는 영화 “생활의 발견” .

그러고 보니 십수년 전에 두어 번 간 기억이 생각난다.

그리고 불국사는 군사정권이 서두르게해서 제대로된 고증없이 날림으로 만든 거라는 기사 정도.

신격화된 역사는 물론, TV 예능 프로그램 대한 큰 감흥이 없는 나는, 모 TV 프로그램에 경주가 나왔다는 말에도 시큰둥해서, 이번에도 별 생각없이 섭씨 38도를 기록하고 있는 경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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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IC 표지판이 나오자 운전대를 쥔 일행이 갑자기 포항으로 들어섰다.

“점심시간도 놓쳤는데 포항 들러서 물회나 먹고 가자”

운전대를 잡은 친구는 포항지점에 오래 계신 지인이 추천한 북구 항구쪽 새포항물회로 간다고 했다.

‘올해초 내가 포항을 갔을때 포항사는 분들이 물회는 이곳이 최고라며 데려간 특미물회와는 이름이 다르지 않은가?

평소 많은 독서량과 사회 전반에 대한 다양한 관심사로 알쓸신잡의 대명사로 통하는 이 친구.

하지만 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아니 이번에는 그대로 따르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급한 마음에 SNS로 포항에 사시는 분들께 의견을 물었다.

“새포항물회 맛없음, 특미물회 맛있음”

답변은 간결했다.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분으로부터 답변이 하나 달렸다. 사야님이었다.

“나는 칠포 흥해 오도리 물회가 맛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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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 들어갈 것 없이 오도리로 왔다.

처음엔 오도르인줄 알고 물회에 오도르를 넣어주나 했지만, 지명이 오로리란다.

북구 칠포 흥해읍 오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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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추장이 아니라 직접 담근 고추장을 내어놓는 포항식 물회.

선장들이 직접 잡아올린 회의 감미로운 식감은 물론, 직접 담근 장의 조화가 더위에 지쳐 늘어진 미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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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는 반찬 중에 나온 방풍나물의 향이 좋았다.

풍을 예방한다고 방풍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방풍나물에는 육지에서 나는 육방풍과, 해안가에서 나는 해방풍이 있는데, 해방풍이 특히 효능이 좋다고 한다. 자연산 해방풍은 거의 사라져서 요즘에는 해안가에서도 재배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육방풍의 효능에 비해 효능이 월등하다고 한다…는 선장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장님, 해방풍 한 접시만 더 주세요”

철근을 씹어 먹어도 아무렇지 않을 나이라는 말을 듣던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몸에 좋다면 개똥이라도 주워서 먹을 나이라는 말이 익숙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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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자리에는 연세 지긋한 노인분들이 섭씨 38도의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풍기 하나 없는 자리에서 물회에 반주를 하고 계셨다.

옆 동네에서 과수원을 하고 계신 분들이라고 했다. 한눈에 봐도 젊은 시절 한 멋 부리고 다니셨다는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끼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조금 있으면 저 다른 동네로 가야할 사람인데 사진은 뭐하러”

“이렇게 맛난거 많이 드시면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지내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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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시 반에 출어해서 고기를 가져온다는 정태화 선장.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한지는 15년 째고, 통산 30년 째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는데.

예전에 유명한 잡지에서 나왔길래 성대하게 대접했더니, 그 기사보고 온 손님은 딱 한 팀 있었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다음에 근처로 지나면 꼭 들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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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나게 드시는 어르신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선장의 모습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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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님이 이곳을 추천한 이유는 딱히 물회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폐허가 된 스튜디오와 어울어진 바다의 풍경이었는데.

시간은 또 그렇게 지나서 골격은 더욱 앙상해졌고, 그 앞쪽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있어서 시야를 가리니 기대했던 풍경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무엇보다도 섭씨 38도 바깥기온은 5분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이제 경주로…

 

 

 

 

<다음에 계속…>

 

 

 

 

 

 

 

미안하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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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이’에 담겨 있던 커다란 방어들 중 한 마리가 팔렸다. 아직 살아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방어를 회로 먹을 수 있는 철은 지났기에 누가 어떤 용도로 사가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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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움직이지 못하게 무릎으로 누르고 아가미 안 쪽에 칼을 집어넣는다. 살고자 몸부림치는 방어의 힘은 대단해서 미끄러운 바닥에서 방어가 튀어나가지 않게 하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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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바다를 누비다 좁은 다라이 안에 담겨진 방어들은 견디지 못하고 파닥거려 보지만 벗어날 수 없다. 이들도 곧 앞선 동료와 같은 운명에 맞이할 것이다. 지능이 낮은 어류라고는 하지만 겪어본 적 없는 낯선 환경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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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께서 잡으신 방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다. 방어는 크기가 제법 큰 어류다 보니 몸에서 나오는 피의 양도 적지 않다. 칼라였다면 더 날스러운 사진이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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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에 칼이 들어갔는데도 방어는 죽지 않고 이따금씩 발작하듯 파닥거린다. 몇차례 다시 찌르는 걸 보고 있노라니 한번에 숨통을 끊으려고 칼을 찌르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로 유지시켜 피를 빼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움직임이 점차 뜸해지는 방어의 머리를 아주머니께서 토닥이며 뭐라고 얘기를 하시는게 아닌가. 뭐라고 하시는 건가 궁금해지던 차에 아주머니 쪽에 더 가까이 있던 일행이 내게 돌아와 얘기를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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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께서 방어한테 ‘미안하다~ 미안하다~ 좋은데 가거라.‘ 라고 얘기하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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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더이상 카메라를 겨눌 수 없었다. 그저 그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그런 마음으로 생명을 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속으로 되뇌일 뿐.

팔닥거리는 싱싱한 물고기들이 넘쳐나는 어시장은 그래서 활기차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지만 그 싱싱한 물고기들은 결국 ‘아직 죽지 않은, 곧 죽을’ 물고기들이다. 주인이 나타나면 곧바로 도마 위에 올려져 목이 달아나고 몸통이 갈라져 살점이 발라진다. 태어나 죽기를 바라는 생명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살고자 하고 죽지 않고자 함은 본능이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 앞에서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르며 모든 생명체는 저항하지만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물고기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덜 처절하게 보여서인지 대부분 잔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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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전에 제주 모슬포항에 방어회를 먹어보러 들렀었다. 여느 횟집들이 그러하듯 손님들이 주문을 하면 뜰채를 들고가 수족관에서 물고기를 잡아 건져 올린다. 그런데 그렇게 수족관에서 꺼낸 커다란 방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횟집 아주머니께서 방망이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이 아닌가. 미끈거리는 물고기이니 빗맞기도 하고 제대로 맞지 않으면 한번에 기절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러차례 방망이를 내려치는데 이 모습은 적잖이 충격으로 남고 말았다. 먹어야 하는 것이니 죽여야 하겠지만 저런 방법 밖에 없나 싶었지만, 또 생각해보니 가만히 잡고 있을 수도 없으니 때려서 기절이라도 시켜야 칼을 댈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회를 먹으려던 마음이 많이 불편해지는 것 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래도 잘 먹긴 먹었다는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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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이 생업인 분들께는 사실 물고기를 죽이는 일에 복잡한 생각을 가지실 이유도 여유도 없을 것이다. 그 분들에겐 반복되는 일상이자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찌른 칼에 피를 쏟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방어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미안하다’고 속삭여주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은 정말이지 놀랍고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비록 생계를 위해 방어의 목숨을 앗아야 하지만 생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저런 분이라면 평소 생활에도 얼마나 따스함이 가득할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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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2. 포항 죽도시장

Leica IIIa / Elmar 5cm f3.5 / Ilford HP5+ 400 / IVED

Leitz Summaron 28mm f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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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라이츠사는 4군 6매 더블가우스 구조의 주마론 28미리를 출시했다.
1935년에 출시된 28미리 Hektor로 20년이나 울궈먹은 끝에 드디어 새로운 28미리가 등장한 것이었다. 주마론은 싱글코팅이 적용되면서 해상도와 콘트라스트가 향상되었으며, 왜곡과 비네팅 억제 측면에서도 헥토르보다 개선되어 당시로서는 최고의 28미리 렌즈라 불릴만 했다. 컴팩트한 사이즈는 바르낙 라이카에 안성맞춤이었고 조리개 조절 방식도 보다 현대적인 형태로 변경되어 사용상의 편의성도 좋아졌다. 단, 여전히 최대 개방값은 어두웠는데 헥토르의 f6.3에서 겨우 반스탑 정도 밝아진 f5.6에 머물렀다는 점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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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28미리를 담당한 Hektor. 조리개 조절이 Elmar처럼 불편한 방식이었고 무코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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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론의 어두운 개방값은 당시로선 보다 밝은 광각 렌즈를 만들어내기 위해 극복해야할 수차가 너무 많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캐논 Serenar 28mm f3.5라든지 28mm f2.8 같은 녀석을 보고 있자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소련에서조차 이미 1937년에 FED 28mm f4.5가 나왔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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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d 28mm f4.5 (라이츠는 뭘 한거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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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주마론이 이렇게 배짱 튕기며 등장할 수 있었던데는 경쟁상대 칼 자이즈의 방만함도 한몫 했을 것이다. Sonnar라는 걸출한 대구경 50미리 라인업으로 라이카가 나름 밝게 만들어보고자 애쓴 Summar, Summitar, Summarit 따위를 뭉개버리며 광학 기술만은 앞선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칼 자이즈도 유독 28미리는 찬밥이었다. 그들 역시 라이츠 못지 않게 별다른 개선 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Tessar 28mm f8.0을 20년 이상 울궈먹고 있던 중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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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Zeiss Jena 28mm f8.0 (제 짝인 콘탁스에서도 거리계 연동이 안되는 목측식이다. 어차피 8.0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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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전 같으면 최대 개방값이 f5.6에 불과한 주마론 따위의 렌즈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테다. 하지만, 자꾸 보다보니 정이 들었는지 모양 만큼은 정말 예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언젠가 한번쯤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한번 사볼까?’ 하고 가볍게 들이기에는 스크류 마운트 렌즈들 중에서도 유독 비싼 가격을 자랑하는데다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아 매물도 귀했다. 아, 물론 훌륭한 대안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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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에서 M마운트로 복각하여 출시한 주마론 28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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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뜬금없이 주마론 복각 모델이 출시되었다. 마운트 형식이 M마운트로 바뀌었지만 광학적 구조는 거의 오리지날 그대로 복각된 이 렌즈는 한동안 각종 커뮤니티를 뜨겁게 도배했다. 아이폰 광고가 떠오를 정도로 깔끔하고 아름다운 생산 과정 이미지들로 구성된 브로셔를 보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품고 싶은 욕심이 들기 마련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정신으로 300만원에 가까운 돈을 지불하고 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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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우연찮게 기회는 찾아왔다. 나의 뜬구름 잡는 리뷰에 현혹되신 어느 팬(?) 분과 자주 연락을 주고 받게 되었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장비 호구 조사를 하다 그 분이 주마론 28미리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어두운 개방값 탓에 잘 손이 가지 않아 제습함에 들어간 후 나올 줄은 모른다고 하셨고 그럴거면 제가 한번 써보겠노라며 빌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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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를 처음 받고 나니 헬리코이드에서 흘러나온 윤활유가 묻은 자국도 많았고 틈새의 찌든 때도 그대로 있는 등 전체적으로 약간 지저분한 상태였다. 평소 장비를 아껴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런 건 또 그냥 못지나가는 성격이라 구석구석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전체적인 외관 상태는 꽤 훌륭했고 전면 코팅의 상태도 양호했다. LED조명을 비춰서 내부를 보니 약간의 헤이즈가 보였지만 헤이즈가 없이 온전히 보존된 개체가 무척 드물다고 하니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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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아니어도 새로운 렌즈를 사용해보는 일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특히 성능의 가늠이 쉽지 않은 올드 렌즈의 경우는 더더욱 흥미롭다. 주마론을 빌려주신 지인께선 이미 주마론에 대한 흥미는 상실하셨고 당시 나의 뜬구름 리뷰에 끌려 다른 광각 렌즈를 구입하시는 바람에 주마론은 처분하기로 맘을 먹으신 상태로 갈 곳까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빌려쓰는 마당에 한달이고 두달이고 마냥 사용해볼 수는 없는 노릇. 눈빠지게 기다리는 새 주인이 눈에 아른거려 3롤의 필름을 후다닥 찍은 후 주마론을 새 주인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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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주일 후 드디어 주마론으로 찍은 필름들을 현상하고 스캔했다. 코팅이 적용되었다곤 하지만 역시나 역광에서는 꽝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해상도는 훌륭했고 지나치게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오밀조밀 세밀한 묘사력이 꽤나 매력적이었다. 이건 정말 스캔 파일로만 볼게 아니라 암실에서 직접 인화한 사진으로 느끼고 싶은 렌즈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 주마론을 보내기 전에 결과물을 한번 봤다면 달랑 3롤만 찍어보고 그렇게 보내진 않았으리라. 어차피 새 주인이 계약금 따위를 걸어놓은 상황도 아니었는데 그냥 내가 사겠다고 가로챌 걸 그랬나 하는 생각마저 잠시 들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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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 렌즈들이 기본적으로 비싼 편이지만 올드 렌즈들 중 인기가 좀 있다는 것들은 계속해서 값이 더 오르고 있다. 주마론 28미리 역시 복각 모델 출시로 인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서인지 과거보다 높아진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상태가 좀 좋다 싶으면 100만원을 훌쩍 넘어가니 그 정도면 보다 뛰어난 성능의 M마운트 Elmarit 28mm f2.8도 구할 수 있을 수준이다. 그렇기에 그만한 금액을 들여 굳이 오래된 주마론 28미리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올드 렌즈를 꼭 광학적 성능 측면에서만 바라볼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냥 좋기만한 현행 렌즈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개성있는 묘사와 독특한 느낌은 광학적 수치만으로 완벽히 설명하기는 어려운 매력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런건 잘 모르겠더라도 예쁘면 되는 거 아닌가? 예쁘다는 이유. 그것 때문에 오늘도 환자들은 괴롭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그것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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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tz Summaron 28mm f5.6 & Leica IIIa

쉽게 얻은 사진

더 쉽고 가까워진 사진 예술

이른 바 ‘예술’이라는 불리는 것들 중에서 사진 만큼 진입 장벽이 낮은 분야가 또 있을까.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촬영을 위한 거대한 카메라와 현상, 인화의 까다로움으로 소수 전문가들만이 다룰 수 있는 특수한 기술이었지만 코닥 필름의 출시와 라이카를 비롯한 소형 카메라의 대중화는 보다 편리하고 신속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지난 50년간의 변화를 뒤엎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던 디지털 카메라의 쓰나미가 밀려오면서 사진의 대중화는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상 그 자체가 되었다. 핸드폰 카메라의 성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고 사진을 기반으로 한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올리고 공유하며 즐거워한다.

이런 디지털 시대의 사진 생활에서 또 하나의 변화가 있다면 이제는 누구나 내가 찍은 사진을 쉽게 편집하고 보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과거에는 사진을 찍고 나면 필름을 빼서 동네 사진관에 가져다주고 ‘사람수 대로 뽑아주세요.’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같은 필름도 사진관에 따라 사진의 색감과 노출이 다르게 뽑혀 나오기도 했지만 거기에 대해 불만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일반인은 거의 없었다.

보다 전문적으로 사진을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사진을 다루기 위해서는 암실에서의 현상/인화 테크닉을 어렵게 배워야했고 숙달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포토샵, 라이트룸 같은 전문 보정프로그램이 등장한 후에도 비싼 가격을 주고 구입해야했으며 능숙하게 다루는 일은 암실 테크닉 못지 않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Snapseed나 VSCO같은 어플리케이션을 핸드폰에 설치하기만 해도 아주 간단하게 자신의 사진을 보정할 수 있고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 전 필터 효과 몇개만 이리저리 적용해보아도 훨씬 분위기 있고 멋진 사진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어렵게 익힌 테크닉들이 터치 한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허무하기까지 할 지경이다.

쉽게 얻은 사진

가끔 RAW 포맷으로 찍은 사진을 라이트룸에서 보정하지 않고 카메라에 내장된 현상 프로그램을 통해 JPG로 변환하기도 한다. 애초에 RAW로 찍을 필요가 없었던 간단히 SNS에 올리거나 자료로서 써먹을 사진들의 경우다. 그런데 때론 라이트룸에 옮기기까지 기다리기가 귀찮고 빨리 결과물을 모니터로 보고 싶어서 카메라 내장 프로그램으로 현상해보기도 하는데 (어디까지나 일단 대충 먼저 보자는 취지로..) 이게 간혹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r0012018[2016.06.06. 포항 죽도시장 / Ricoh GR]

이 사진이 그런 경우로 Ricoh GR로 찍은 컷을 간단히 카메라의 포지티브 모드로 설정하여 JPG로 뽑아낸 컷이다. 포지티브 모드는 채도와 콘트라스트를 높여주는 방식으로 세팅이 되어 있는데 보통의 경우 그 효과가 다소 과하여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는데 유독 이 컷에는 꽤 어울려 라이트룸에서 다시 손 볼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라이트룸에서 보정했다면 내 기준으로는 다소 과한 채도와 콘트라스트의 이런 느낌이 나오지 않았을테다.)

버튼 몇번 꾹꾹 눌러줘서 만든 이미지치곤 꽤나 쨍하고 임팩트 있는 느낌이 맘에 들어 그 상태 그대로 ‘성의없이’ 모 사진 커뮤니티에 포스팅 했었다. 그런데 이 사진이 그 날 바로 베스트갤러리에 올라 버렸다. 너무나 쉽게 만들어낸 사진이라 그런지 별 애착도 없던 컷이 뜨거운 반응을 받으니 ‘응? 이게?’ 하며 살짝 당황했던 것도 사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렇다. 사진은 결과 그 자체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맞거늘 나는 언제나 그 과정과 수단에도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왔던 것은 아닌가. 아무리 좋은 사진을 봐도 그것이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라면 ‘에이 저렇게 좋은 컷을 찍을거면 카메라로 찍지.’ 라며 혀를 찼고 디지털 카메라로 좋은 사진을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아 저 사람 필름으로 찍으면 더 좋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최신 DSLR과 AF렌즈를 사용해 찍은 다이내믹하면서 칼 같이 초점이 맞은 사진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구닥다리 라이카를 이용해 찍은 결정적 순간에는 더 후한 점수를 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같은 프린트물이라도 작가가 FB인화지에 직접 수동 인화했다고 하면 ‘아 그래요?’ 하면서 그제서야 다시 눈을 가까이 들이대고 작품을 살폈으니…

모든 기술은 보다 편리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을 칭송하고 편리함을 평가절하 하는 이 못된 심보는 아날로그부터 사진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꼰대스런 심리때문인지, 아니면 프로와 달리 작업의 신속성이 중요하지 않고 대량의 이미지를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취미 사진가로서 즐길 수 있는 재미가 불편함 속에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너무 쉬우면 재미는 없지 않냔 말이지.

쉬워도 탈인가…

저 방어 사진은 그 사진 커뮤니티가 사라지지 않는 한 베스트 갤러리에 남아 남들에게 보여지며 꾸준히 추천수가 한두개씩 더 늘어나겠지만, 너무 쉽게 얻어낸 사진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론 크게 의미를 두거나 애착이 가지 않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아무도 카메라 내장 프로그램으로 보정한 줄 모르고 안다고 한들 사진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참 희한한 심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