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송도

사실 창고가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은 ‘서재’라고 부르고 싶은 내 방 책꽂이 한 켠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안에는 수백롤의 필름이 차곡차곡 담겨져 있는데 여기저기 널려있는 필름들을 보다 못한 와이프가 넣어준 것들이다. 내 저것들을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텐데 하며 가끔 노려보기도 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 만다.

‘에이, 나중에 하자.’

그러다 지난 금요일밤 괜히 한번 상자를 열어봤다. 마구잡이로 섞인 필름들을 천장의 형광등에 비추어보며 간만에 추억에 젖다가 송도 해수욕장을 촬영한 필름 하나를 발견했다. 36컷을 모두 살펴봐도 그 필름에서 기억나는 이미지는 단 한 컷도 없었다. 메모조차 해두지 않아 언제 찍은 건지도 알 수 없는 필름 속 이미지들은 전혀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빠듯한 용돈 사정으로 인해 인화지 한 장이 아쉬웠다. 그래서 굳이 ‘불필요한’ 밀착 인화는 생략했고 확대 인화 역시 한 롤에서 고르고 고른 몇 컷 외에는 하지 않았다. 이 버릇은 나중에도 그대로 이어져 스캔할 때도 한 롤 전체를 긁지 않고 네가티브를 비추어 보고 괜찮다 싶은 몇 컷만 추려 스캔을 해왔기에 네가티브를 보다가 새롭게 눈에 띄는 컷이 있는 경우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한 롤에서 한 컷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아도 이 건 단 한 컷도 스캔하지 않은채 쳐박힌 필름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도대체 이 필름은 왜 버림받았을까? 일단 한롤을 채로 긁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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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의 뒷골목 입구에서 부터 내 발걸음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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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사장의 유실로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송도 해변의 회생을 포기하고 해안 도로가 건설되던 때의 막바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산책로는 거의 다 되었고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던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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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평화의 여신상이 있는 광장 해안 축대 옆의 테트라포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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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산책로에는 아직 모래가 많이 남아 있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아이들이 두꺼운 차림에 장갑까지 끼고 있는 걸 보니 제법 추운 날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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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억은 이미지와 글에 얼마나 의존적인가. 21미리로 강아지를 이렇게 가까이서 찍었을 정도면 기억이 날 법도 한데, 현상 후 스캔조차 하지 않았던 탓에 이날 촬영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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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해변 일주도로 건설을 맡았던 청구 건설의 현장 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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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해변 방파제 위에는 허름하고 어설픈 포장마차촌이 있었다. 송도 해수욕장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이 곳도 사라졌다. 당연히 무허가 불법이었을테고 태풍이라도 오는 날엔 위험하기 그지 없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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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의 수상가옥 마냥 방파제 한 귀퉁에 의지하여 바다 위에 자리 잡았던 포장마차들. 자리에 앉으면 판자로 만든 바닥과 천막 틈 사이로 파도가 출렁였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들으며 회 한 접시에 소주를 마시고 모래사장에 세워둔 차에서 눈을 붙히고 아침에 바로 출근했던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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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을 뒤집어 씌웠던 철골과 계단의 녹물이 방파제 바닥 곳곳을 붉게 물들였던 것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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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내린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는 손길들. 포장마차가 사라진 지금, 더이상 배들은 이 곳에 접안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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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왼쪽의 풍경. 송도 해변과 포항 구항이 멀리 보인다. 늘상 보는 장면이라 새롭지 않지만 이곳이 동해안에 몇 없는 지형인 영일만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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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과다현상이 되어 콘트라스트가 강한 네가티브가 되었다. 암부가 많이 죽었음이 느껴진다만 평소 사진의 톤에 비해 칼칼한 것이 또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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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에서 굿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인가, 요즘은 송도에서 굿하는 장면을 거의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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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버린 방파제 위 풍경과 달리 송도의 퇴락한 뒷골목은 이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골목 사이를 누비면서 정적인 사진에 동감을 불어 넣고자 누군가 지나가기를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래본들 무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사진이 되겠나 싶다.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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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나뭇가지가 낡은 하얀 벽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흑백인데도 차갑고 투명한 겨울 공기가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려오는 걸 보니 늙은 듯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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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덕분에 이 필름이 언제 찍은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8년전의 블로그 포스팅에는 Nikon D700으로 같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이 날 찍은 파일은 모두 지워 버렸다는 내용이 있었다. 찍은 사진도 맘에 안들고 앞으로 어떤 사진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유와 함께. 아마 그래서 이 날 찍은 필름도 스캔조차 하지 않고 던져뒀던 듯 싶다.

 

 

8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날 느꼈던 회의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뭘 찍어야 하고 뭘 표현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찍어야 하는가. 아니 그런 것에 답은 있는가. 답을 찾을 필요는 또 있는 것인가. 여전히 머리 속은 복잡하지만 이렇게 출토된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사진들이라도 시간의 무게가 더해지니 기록으로라도 가치가 있겠다 싶으니 그건 또 다행이라 해야하나. 아직도 모르겠다.

 

 

2009.12.26. 포항 송도

Contax IIa / Carl Zeiss Biogon 21mm f4.5 / Kodak 400TX / IVED

광고

Nippon Kogaku의 Topogon : W-Nikkor 2.5cm f4.0

 

거침없이 달리시는 만수동생님 덕분에 관심있던 렌즈를 빌려 써보게 됐다.

54년에 발매된 W-Nikkor 2.5cm f4.0이 그 주인공. 환갑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어마무시한 몸값을 자랑하는 귀한 녀석이다. 원래는 Zeiss Ikon의 Contax와 같은 형태의 니콘 S마운트로 발매되었지만 라이카에서도 사용가능한 M39(LTM) 마운트로도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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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ppon Kogaku W-Nikkor 2.5cm f4.0 (LTM버전)

 

오늘날 기준으로 25mm라는 화각은 다소 낯설긴 하지만 당시로서는 거의 초광각에 해당하는 것이라 사진가들의 환호를 받았으리라. 이 렌즈에 대한 매니아층은 오늘날도 제법 두터운데 그 이유는 우수한 성능도 성능이지만 특이한 구조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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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이 렌즈는 4군 4매 구성된 완벽한 좌우대칭의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같은 극단적인 좌우 대칭 구조를 통해 광각 렌즈에서 왜곡을 비롯한 각종 수차를 물리적으로 억제할 수 있었다. 마치 구슬과도 같은 렌즈 알을 보고 있자면 영롱한 매력에 빠져드는데 이같은 설계의 원조는 사실 Carl Zeiss의 Topogo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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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것이 오리지날 Carl Zeiss Jena Topogon 25mm. 화각부터 최대개방값까지 똑같다. 50년대 니폰 코가쿠, 캐논 등의 일본 메이커들은 독일 메이커들의 설계를 다분히 참고한 제품들을 출시하는 한편 그들의 성능을 뛰어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뭐 하나라도 개선된 점을 어필하는 것이 중요했던지라 오리지날 Topogon이 거리계와 연동되지 않는 목측식이었던 것에 반해 W-Nikkor 2.5cm는 거리계 연동이 가능하게 출시되었다. (캐논의 25mm f3.5는 최대 개방값도 아주 조금 더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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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팅 역시 당대 독일 렌즈들보다 두터워 보이는데 역시나 역광에서 버티는 능력도 제법 준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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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ogon 타입임을 증명하듯 렌즈알이 반구형으로 볼록하게 나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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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에서는 더욱 그 형태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정말 구슬을 하나 박아넣은 듯한 모양이라 가만히 들여다 보고만 있어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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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Topogon 타입은 급격하게 꺾인 렌즈 끝단의 곡률로 인해 주변부의 화질이 많이 떨어지고 비네팅이 심하게 발생하는 단점을 가지는데 이때문에 최대 개방시에도 조리개는 완전히 다 열리지 않게 설계함으로써 그 문제를 최대한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 위 사진에서도 최대 개방에서 조리개날이 완전히 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렌즈는 비네팅이 제법 발생하며 개방시에는 더욱 심해진다. 반면 오리지날의 위엄은 역시 무시할 수 없는지 칼 자이즈의 Topogon은 조리개가 거의 대부분 열리면서도 W-Nikkor에 비해 비네팅이 적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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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계의 단위는 FEET로만 적혀있고 라이카 스크류 렌즈들과 같은 형태의 무한대 잠금 장치를 가지고 있다. 크롬 코팅이나 레터링 각인의 수준은 훌륭하다. 코팅된 렌즈임을 표기해주는 빨간색 “C”마킹도 적당한 시각적 포인트가 되어준다. Carl Zeiss 렌즈들의 “T”마킹을 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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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터 구경은 상당히 특이한 34.5mm로 오늘날 해당하는 사이즈의 필터를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중앙카메라 수리실에 제작을 의뢰해 만들었다. 앞으로 애매한 사이즈의 필터는 비싸게 구할 생각하지 말고 애초에 부탁드려 만드는 것이 더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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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필터링에다가 광택도 최대한 비슷하게 제작되어 제짝인 듯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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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야무진 렌즈에 어울리지 않는 플라스틱이라 좀 깬다만 올드 렌즈에서 일반적인 금속제 슬립온 방식에 비해 훨씬 안정적인 클립온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앞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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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와의 매칭. 슬림한 경통에 짧은 길이의 컴팩트한 렌즈로 바르낙 바디에 제법 잘 어울린다. 25미리 파인더가 없어서 일단 Voigtlander 28mm 파인더로..ㄷ

많은 롤을 찍어보지 못해 렌즈의 특성에 대해 평가를 내리기 조심스럽지만 니콘은 니콘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에는 물론 장단이 존재하는데 흔히 니콘 렌즈의 특성으로 평가받는 높은 선예도와 강한 콘트라스트는 이미 이 시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칼라 색감 역시 화사하고 예쁜 쪽은 아니지만 Topogon타입의 특징에 기인하는 강한 비네팅 효과와 왜곡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쭉쭉 뻗는 시원시원함은 렌즈의 개성을 확실히 드러내준다.

 

 

B/W Neagtive : Kodak 400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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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itive : Fujifilm RVP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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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15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15-1

 

 

170617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22-1

 

 

170617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29-1

 

 

170617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33-1

 

 

170617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35-1

 

 

끝으로 귀한 렌즈 빌려주신 만수동생님과 렌즈 뒷캡으로 IIIf를 보내준 Qunaj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보다 훌륭한 리뷰를 보려면

Qunaj님의 ‘W-NIKKOR C 2.5cm 1:4 LTM

Goliathus님의 ‘[Nikon]W-Nikkor 2.5cm F4

두물머리

이른 새벽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옆에서 자고 있는 와이프와 딸냄이 깰라 얼른 알람을 끄고 이불 밖으로 기어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동생도 부시시한 얼굴로 거실로 나와 있다. 얼굴에 물만 바르고 카메라를 챙겨 차에 올랐다. 여름이라 벌써 밖이 환하다. 지금 가도 드라마틱한 장면을 만나기엔 늦었겠다 싶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강바람 맞으며 잠시 유유자적하면 될것인데.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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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분을 달려 두물머리에 도착했다. 역시나 새벽부터 부지런함을 떤 수많은 사진가들이 진을 치고 있다. 팔당호를 지나며 보니 물안개가 제법 피었던 것 같은데 저들은 늦잠을 포기한 보람이 어느정도 있었을 것 같다. 다 늦은 시간 도착해 삼각대도 없이 허접해보이는 낡은 카메라를 들고 기웃거리는 나를 보고 혀를 찼을 이도 있었으리라. ‘난 꼭 사진찍으러 온게 아니라니깐.’ 괜히 속으로 변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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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들처럼 나도 두물머리를 자주 찾은 적이 있었다. 회기역 뒷편에서 버스를 타고 ‘오늘은 물안개가 피어올라줄까?’ 하는 부질없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사실 잘 찍어봐야 달력 사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겠지만 그 땐 그래도 그 한 컷을 건지고 싶었다. 일교차가 큰 늦가을, 초겨울에 주로 찾아야 했던 탓에 강가의 새벽 한기에 오들오들 떨어야 했고, 심지어 두물머리에 가면 서 있는 커다른 나무 아래 벤치에 누워 쪽잠을 자며 밤을 샌 적도 있었지만 한번도 마음에 쏙 드는 장면을 만나지 못했다.  두물머리 출사는 고생에 비해 성공 가능성이 너무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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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이미 높다. 작정하고 사진을 찍으러 왔으면 역시 더 일찍 왔어야겠다. 예쁜 풍경 사진, 이른바 달력 사진은 전형적인 아마추어들의 몫이지만 어쨌든 부지런하지 않으면 그 또한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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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로 구성된 동호회 회원들은 이제 철수를 시작했다. 저마다 최신의 DSLR에 짓조 삼각대 따위를 갖추고 있었다. 같은 위치에서 우루루 모여서 셔터를 눌러댔으니 얼마나 다른 컷들이 담겨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기대를 안고 메모리 카드를 PC에 꽂아 오늘의 수확물을 확인하며 즐거워 하리라. 저 모임 안에서도 이른바 사진을 제일 잘 찍는다는 에이스가 있을거고 좋은 장비를 많이 가져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이들도 있겠지. 고만고만한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누가 더 잘 찍고 못 찍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역시 ‘이놈의 사진 찍어봤자 뭐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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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배가 조금 지긋해보이는 분에게 셔터를 좀 눌러달라고 부탁드렸다. ‘하나~두울~ 셋!’ 셔터를 누르시고 나더니 버릇처럼 카메라 뒷면을 보신다. ‘아 이거 필름 카메라네요? 라이카네.’ 내 니콘 D700은 제습함에 들어가 나오지 못한지가 1년도 넘은 것 같은데 세상의 주류는 역시 디지털인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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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 하고 싶은건 하겠다며 돈지랄인 필름 사진질을 놓지 않고 있는 나와 달리 직장 생활과 육아에 지친 동생은 이제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다. 대학교 다닐 땐 이 곳에서 찍은 슬라이드 컷으로 학교 동아리 전시회에 걸기도 했던 동생이지만 이제는 핸드폰으로나 두물머리의 풍경을 찍고 있다.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면 그렇게 어른이, 가장이 되어가는건가 싶기도 하고 피곤에 찌든 그의 모습을 볼 때면 늘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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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3군 사령부 직할 통신대에서 운전병으로 군생활을 했다. 선임들이 칼 같이 다려준 전투복을 입고 100일 휴가를 나와 할머니께 ‘선봉!’하고 경례를 붙이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휴가 나올 때와 달리 복귀 때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않을 정도로 의기소침했던 동생은 부대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도 아직 복귀 시간이 남았다며 들어가기 싫어했다. 돌아갈 길이 먼 부모님과 나는 그냥 일찍 들어 가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복귀 시간까지 더 있어줬고 그래서 시간을 떼우러 들른 곳이 이 곳 두물머리였다. 동생의 중대는 이 근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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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이가 많아지면서 주차장도 넓게 만들어져 있고 주변엔 까페도 많이 생겼다. 땅값도 제법 올랐을텐데 상수원 보호지역이라 개발이 호락호락하지 않은지 낡은 빈집은 그대로 남아있다. 변하지 않은 건 한강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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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는 그동안 찾은 횟수에 비해 건진 사진이 그리 없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곳이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제법 많은 추억이 쌓여진 곳이었다. 이제 예전처럼 여기에 오면서 뭔가 ‘작품’을 건져야겠다는 욕심은 들지 않지만 서울에 오게되면 동생과 드라이브 삼아 찾고 싶은 곳은 여전히 두물머리긴 하다. 벌써 10년이 다되어 간다는 사실이 소스라치게 놀랍지만, 동생이 막 서울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출장 길에 서울에 들른 나는 늦은 밤에 문득 두물머리에 가보고 싶다고 했고 ‘지금 가보지 뭐.’ 라며 동생은 차를 돌렸다. 아버지께서 물려준 구형 SM520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중형차라 하기에 실내 공간도 좁고 인테리어도 올드했지만 전형적인 세단처럼 생긴 디자인이 멋졌고 탄탄한 서스펜션의 주행감각도 나름 좋았다. (게다가 수동 미션이었다) 동생이 운전하는 그 SM520을 타고 음악을 크게 틀고 하늘만큼 캄캄한 한강을 거슬러 두물머리로 향하던 그 날 밤이 문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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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4. 양평

Leica IIIa / Elmar 5cm f3.5 / Kodak 400TX / IVED

 

 

 

JPG는 이미지가 아니다.

일년에 겨우 두어번밖에 사용하지 못하지만 작업실은 이속에 독락의 성소입니다. 허접합니다. 덩그러니 확대기에 수도시설은 문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에어컨도 없고 보일러가 고장이라 여름이나 겨울엔 인화작업을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이 작업실을 이용하기에 ‘딱’인거죠….정수기 물을 빼면 딱 20도! 현상하고 인화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추억은 인화지에 노광될 때 비로소 살아나 온전히 추억이 됩니다. 컴퓨터 하드에 또는 스마트폰 사진함에 보관된 파일들이 이미지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이렇게 꼭 아날로그 작업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잠자고 있는 파일들을 깨워 종이에 옮겨보면 좋겠습니다. 물질만이 전해 줄 수 있는 느낌이 있습니다. 모니터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그런 것 말이죠.

jpg는 이미지가 아니라 그냥 파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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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암실입니다. 싸구려 테이블을 바꿔야 겠다고 생각합니다만 행동에 옮겨지지가 않네요. 게으름이 천성이라 안타깝기가 국회의사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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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L7452 흑백전용 확대기를 사용합니다. 미국으로 사진유학 간 지인이 쓰던 것인데 강원도에서 데려왔습니다. 벌써 강산이 한번쯤은 변한 것 같은데요. 4×5 시트 필름까지 작업할 수 있습니다. 아주 깔끔한 확대기 입니다. 타이머랑 이젤 등 악세사리들도 모두 제치들이라 나름 만족스런 조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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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약품을 준비합니다. 현상액, 정지액, 정착액, 1차수세, 테스트 용지 버릴 여분의 바트까지…스텐 싱크를 주문해서 수도시설을 할까 싶기도 한데 배수문제도 있고 공사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아 아직은 그냥 두고 있습니다만. 이집에 계속 살겠다는 확신이 서면 공사를 해야겠어요. 정지액을 담은 바트는 덮어둡니다. 현상이나 인화를 해 보신 분들은 이유를 아실 듯 한데요. 나름 저만의 노하우라고도 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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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인화할 네거티브를 골라야죠.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라이트박스나 밀착해 놓은 것이 있으면 쉽게 선택 할 수 있을테지만 번거럽고 또 그렇게 치밀하지 않은 사람이라 백열등으로 족합니다. 한 컷 한 컷 들여다 보는 재미는…뭐랄까요. 보물상자에 쌓아둔 것들을 하나씩 꺼내보는 그런 느낌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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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한 네거티브를 케리어에 물려서 확대기에 겁니다. 두근 반 세근 반…글을 쓰는 지금, 생각만으로도 즐겁네요. 달깍…케리어를 확대기에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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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등을 제외한 조명을 모두 끕니다. 상이 맺히네요. 핀을 맞춥니다. 이 순간은 늘 짜릿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사진 찍을 때 보다 이때가 기분이 더 좋습니다. 테스트 인화지를 올려서 노광시간을 측정합니다. 2초 간격을 두기도 하고 3초 간격을 두기도 하고 화이버 베이스 인화지인 경우는 노광시간을 훨씬 더 줘야 합니다. 원고가 좋으면 대부분 1차 테스트로 데이터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컨디션이 꽝이거나 원고가 거친 것은 한번쯤 테스트를 더 해서 데이터를 얻습니다. 이제 인화지를 이젤에 꼼꼼히 물리고 타이머를 셋팅합니다. 한번에 다 주지 않고 잘라서 여러번…이 때 닷징, 버닝을 열심히 합니다. 저는 주로 2호반, 4호반 필터를 주로 사용하는데요. 가끔 0호나 5호 필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작업한지 오래 되서 감각도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만 대략 맞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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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정지, 정착은 암실에서 이루어 집니다. 1차 수세를 마치고 2차 수세를 위해 암실밖 싱크대로 왔습니다. 노광이 적당합니다. 맘에 들어요. 수온이 작업하기에 ‘딱’입니다. 게다가 맘에 드는 인화물을 보는 것 만큼 기분좋은 일도 드물겁니다. 흐르는 물에 꼼꼼히 씯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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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의 인화물이 완성되었네요. 이제 말리면 됩니다. RC인화지 전용 건조기를 쓰기도 하고 널어서 빨래처럼 말리기도 하는데 저는 헤어드라이기로 말립니다.^^

오랜만에 작업실 청소라도 좀 해야할 것 같아요.

바르낙과 나의 처가

케케묵은 고물 카메라와 렌즈를 사용하는 일은 생각보다 꽤 성가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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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할 멀티측광에 초당 수컷이 촤르르 찍히는 모터드라이브, 순식간에 초점을 맞춰주는 AF기능이 기본이 된 오늘날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칠순이 훌쩍지나 팔순을 바라보는 바르낙옹을 손에 쥐고 다니는지 스스로도 가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노출계는 당연히 없고 셔터스피드도 유럽식이라 1/40, 1/100, 1/200 같이 애매하게 되어있다. 여기에다 오늘 붙혀둔 Elmar 3.5cm는 또 어떠한가. 코팅도 적용되어 있지 않은 맨유리알인데다 조리개 수치도 4.5, 6.3, 9, 12 등으로 희한하기 그지없다. 노출계야 외장으로 쓴다 쳐도 측광값을 카메라와 렌즈에 적용하기 참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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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런 녀석을 데리고 다니자면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한다. 1/3스탑 단위로 브라캐팅을 하던 결벽증 따위는 저 멀리로 던져 버리고 부처님같은 관용도의 400TX를 믿고 ‘대충’ 맞춰서 셔터를 눌러야 한다. 무코팅이라 역광에 맞서는 무모한 짓도 최소화한다. 파인더를 들여보다 영 자신이 없다 싶으면 포기하면 된다. 태양에 맞서봤자 Summicron 35mm ASPH같은 사진을 만들어줄리는 만무하다. 이 녀석으로 잘할 수 있는 장면에 그저 충실하기로. 그것이 이 오래된 카메라와 렌즈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사진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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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편함과 명확한 성능상의 한계는 이미지 퀄리티라는 측면에서는 어쨌거나 모든 면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취미 사진가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무조건 단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보다 유리한 빛의 상황을 파악하고 단점은 커버하고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면과 피사체를 찾아나서게 한다. 그야말로 쇠붙이와 유리로만 만들어진 정직하고 단순한 기계로 세상과 1:1로 마주한다는 느낌. 여기서 오는 소탈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기름지게 번들거리는 현행 렌즈의 화려한 코팅색도 부럽지 않고 최첨단 기능이 녹아있는 멋드러진 DSLR도 부럽지 않다. 밧데리 없으면 찍지도 못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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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처가는 경북 청송이다. 경북에서도 산간 내륙인 이 곳은 전국적으로 봐도 가장 발전이 더딘 곳 중 하나다. 처가가 있는 마을은 청송군에서는 비교적 큰 곳인 청송읍과 진보면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제법 잘 가꾸어진 너른 솔밭이 푸르고 시원한 그늘을 선물해주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산 사이로 흐르는 작은 개천과 그 개천을 따라 이어진 논밭이 제법 너르게 자리한, 작지만 아담한 동네다. 이 곳에서 자란 나의 아내는 어릴 적 동네 오빠야들을 따라 산을 오르내리고 논두렁에서 뛰어내리며 슈퍼맨 놀이를 하고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하교길에 장인어른의 경운기라도 만나면 ‘아빠!’하고 달려가 점방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경운기를 타고 집으로 오던게 그렇게 좋았다고 하는 나의 아내. 나는 나의 아내가 그런 소박하고 행복한 유년 시절을 겪었음이 감사했고 나의 처가가 이런 곳이라 퍽 마음에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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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를 갈 때면 언제나 카메라를 챙겨간다. 넓지 않은 동네라 돌아다녀봐야 찍을 것이 많지 않지만 계절과 빛의 변화가 보다 솔직하게 드러나는 이 곳에 가면서 카메라를 챙겨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어버이날을 며칠 앞둔 주말 찾았던 처가에서 속닥한 카메라 하나를 손에 쥐고 논길과 농로를 따라 걷고 두리번거리며 2롤의 필름을 찍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이 곳에서 빠르고 편리한 카메라가 장점을 발휘할 일은 없다. 정직하게 제 속도에 셔터가 끊기고 빛이 들어오는 구멍만 제대로 조절되면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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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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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6~07 경북 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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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ca IIIa / Elmar 3.5cm f3.5 (uncoated) / Kodak 400TX / IVED

언제나 몇번이라도

가까운 곳, 주변의 모습은 익숙한 탓에 새롭게 바라보기 쉽지 않다.

 

익숙한 곳에서 긴장된 시선과 감정을 유지하며 프레임을 짜기란 그래서 의외로 어렵다. 물론 사진찍는 이들은 누구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이 맹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찍지 않아도 내일 찍으면 되는 그런 장면 앞에 절박한 감정은 들 수가 없다. 그게 솔직할게다. 머리와 가슴이 일치되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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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있는 공단을 내려가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하나 나온다. 이 곳을 지나야 정말 퇴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이다. 해질 무렵이면 개천 너머 너른 들판 위로 석양이 멋지게 비치는 이 곳을 지나며 언젠가는 한번 찍어야지 하던게 벌써 10년이다.  나름 붐비는 퇴근 시간대에 이 곳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있자면 퇴근하는 동료들이 나를 보기 십상이라 괜시리 신경이 쓰이지만 그래도 이 날은 찍어보기로 했다. 보가 있어서 이 가뭄에도 수량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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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더 몰고 나와 보리를 막 수확한 밭 언저리에 이르렀다. 생각보다 너른 들이 많지 않은 경상도에서 이정도면 제법 평야라 부를만하다. 형산강을 끼고 있는 경주에는 건천과 안강 등 여전히 절대 농지로 묶여 있는 풍요로운 곡창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의 도읍으로서 경주의 입지는 훌륭한 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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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개수로 옆 길을 따라 사람들이 제법 뜨문뜨문 오고 갔다. 이런 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낯선 이를 보고 모두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그래도 오늘은 ‘땅 보러 왔는교?’, ‘여기에 길 난다 카든교?’ 따위의 질문은 받지 않았다. 개발이 되고 땅값이 오르길 바라는 것이 하릴없는 시골 사람들의 가장 큰 꿈이 되버린 시대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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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수확이 끝난 밭에는 물이 들어가고 있다. 며칠 후면 이 곳에 벼가 빼곡히 심길 것이다. 서양인들의 눈에는 지극히 동양적이고 또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반영된 농촌 풍경의 상징과도 같은 논. 나는 논을 볼 때 마다 새삼 경외로움을 느낀다. 연중 무덥고 강수량이 풍부한 동남아와 비교해 기온과 강수량이 들쭉날쭉한 동북아 끄트머리의 우리는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거친 땅을 개간하고 먼 곳의 물을 끌어와 벼를 심었던 우리 조상의 땀과 눈물이 찰랑찰랑 담긴 것이 논이 다.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내던져졌어도 우리는 그 곳에 논을 개간해 내고야 말지 않았던가. 돈 안되는 쓸모없는 땅 취급 받는 논은 그래서 더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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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낮은 빛이 기대이상의 풍부한 톤을 만들어줬다. 해상도, 콘트라스트 모두 낮은 1949년산 구닥다리 Elmar 3.5cm지만 가끔씩 이런 사진을 만들어주니 미워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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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만 사진을 보다 문득 많이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큼발랄한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가을을 타는 듯한 심리적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제법 오래다. 까칠하고 독하다는 소리를 회사에서 주로 들어왔지만 사실은 유리 멘탈인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선공을 날려왔던 것인데, 이미 여기서의 내 이미지는 그렇게 굳었다. 속한 집단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가진 것이 비단 나뿐이겠냐만 이렇게 너른 하늘 아래 혼자 서면 문득 울컥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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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몇번이라도, 담을 수 있는 장면이고 장소였지만 최근에야 나는 회사 인근 촌동네 건천을 필름에 담아오고 있다.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자 새로운 모습이 보이고 새로운 장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복이다. 허투로 지나칠 장면은 없다. 모두가 지나고 나면 소중한 것들… 언제나 몇번이라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더이상 만날 수 없으리라. 주변의 모습에 셔터를 누를 때 마다 그 슬픈 시한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와이프와 연애할 때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금 이야기를 써먹은 적이 있다. 세상에 소중한 금이 세 가지가 있는데 ‘변치않는 황금’과 ‘생명을 유지해주는 소금’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지금’이란 오글거리는 멘트였는데 나름 반응은 괜찮았… 어쨌든 ‘지금’은 쉬이 흘러보낼 수 있는 사소한 일상이겠지만 언제나 몇번이라도 계속 될 수는 없는 그 유한성을 생각하며 그래, 오늘에 더 충실하자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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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경주 건천

Leica IIIa / Elmar 3.5cm f/3.5 (coated) / Kodak 400TX / 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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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요새 이래저래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매거진에 완전 소홀했습니다. 반성의 의미로 넋두리를 끄적여 보았으니 괘념치 마소서. ㄷ

 

 

 

 

옛 충남도청 – 대전

 

근대 문화 유산에 대한 개인적 흥미로 인해 오랜 모습을 간직한 곳을 방문하기를 즐긴다. 물론 우리에게 ‘근대’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무척 혼란스럽다. 새로운 기술과 가치관이 쏟아지던 ‘모던’의 향수와는 거리가 멀었던 시대상 탓에 근대 문화 유산을 사진에 담는 작업은 그래서 또 곤혹스럽고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아직 정리할만한 사진도, 자료도 또 그럴만큼 많은 작업을 하지도 못했지만 B급 사진 멤버들의 릴레이를 기대하며 지난 출장 길에 들렀던 대전의 옛 충남도청 사진들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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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에 위치한 옛 충남도청 건물. 1932년에 지어져 2012년까지 도청으로서 역할을 하였고 내포 신도시로 도청이 이전한 이후 현재는 대전 근현대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초에는 2층으로 건설되었으나 해방 후 3층을 추가로 얹었다. 당당하게 자리잡은 건물은 현재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과 일직선으로 이어져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에 들어선 일제의 통치시설 답게 권위적이고 위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런 이 건물에서 권위를 느껴야하는 것 또한 우리 근대사의 아픔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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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복도의 모습. 샹들리에 조명 위와 바닥에 별 문양이 보인다. 이 별 문양은 건물 벽면을 비롯한 곳곳에 장식되어 있는데 조선총독부에 있는 그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한 때 논란이 되었다고 하는데 ‘큰 의미’는 없는 것으로 밝혀져 지금껏 남아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진짜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는 쪽국애들한테 물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굳이 추론해보자면 교통의 중심지 대전이니 나침반의 방위각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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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외벽에도 이처럼 별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사실 이런 문양은 우리에겐 그 개념이 없던 것으로 대한제국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이화(배꽃)문양도 사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거기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들이 많다. 사실상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해진 일본이 자신들의 지방 정부와 같은 정도로 격하하기 위해 문양 사용을 강요했다는 얘기부터 그렇지 않은 자주권의 발현이었다는 얘기까지 있지만 뭐가 맞든지 간에 힘없는 나라의 슬픈 역사는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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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이 넘은 건물이니만치 그동안 창틀 정도는 교체되었을 만도 한데 여전히 원형 그대로인 것으로 보였다. 오래 되었어도 튼튼하게 남아있는 교량이나 건물들을 보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하시던 얘기가 떠올랐다. ‘일본놈들이 말이야. 뭐니뭐니 해도 저런거 만들어 놓은거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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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가보기로 한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은 반들거렸고 넓은 채광창은 별다른 장식조차 없이 단조로워 사무공간다운 딱딱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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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다 뒤돌아서 입구로 누군가 들어오길 기다려봤지만 한참을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던 차에 그나마 한 분이 나타나셔서 셔터를 눌렀다.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온지라 전시관 문도 열리지 않았고 찾는 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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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너무 없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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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 오르면 한 가운데 도지사 집무실이 있다. 개방되어 실내를 구경할 수 있지만 역시 너무 이른 시간이 문이 닫혀 있었다. 결국 도지사 집무실을 등지고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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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바로 옆에는 충남지방경찰청 옛 건물이 남아있다. 이 건물은 해방 후의 건물이지만 일제 당시에도 도청 바로 옆에 경찰서 건물이 자리하여 행정과 치안의 핵심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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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옆에는 다소 특이한 형태의 상무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곳은 일제 당시 일본 경찰들이 유도 등 무예를 수련하고 신체를 단련하던 ‘무덕전’이라는 일본식 건물이 있던 자리로 해방 후 원래 건물은 소실되고 1963년에 그 기초를 이용해 다시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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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있던 무덕전.  1967년에 철거되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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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처럼 각 지방 경찰서에 무덕전이라는 건물을 지어 경찰들이 유도를 수련하게 했는데 軍도 아닌 경찰에서 ‘武’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한 것만 봐도 그들의 통치, 치안 철학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아무 생각이 없다보니 해방 후에 새로 지어진 이 건물의 이름도 ‘상무관’이다. 일제가 남긴 것은 소나무의 상채기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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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시간에 오는 바람에 전시관을 보지 못해 얻을 수 있었던 정보와 자료를 접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언젠가 다시 방문할 일이 있기를 기대하며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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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5. 대전

Leica IIIa / Canon 28mm f2.8 LTM / Ilford HP5+ 400 / I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