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대학

JR 삿포로역에서 북으로 10여분 걸으면 북해도 유일의 종합대학 홋카이도대 캠퍼스를 만날 수 있다. 교직원으로 밥벌이하는 탓에 여행을 가서도 직업적, 사진적 호기심 범벅으로 그 지역 주변의 학교를 둘러보는 편인데, 운 좋게도 우리 숙소가 지척이라 이른 아침시간을 빌어 살짝 다녀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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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대학의 남문, 정문과 불과 50여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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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중심에 한적하고 너른 캠퍼스는 삿포로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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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이후, 본격적인 근대화의 행로에서 북해도는 본토의 시각에서 볼 때 일종의 아메리카 대륙과도 같았으리라. 비옥한 토지와 동해의 풍부한 수산자원은 철저히 개척되어야 할 대상이었을테고, 이를 착실하게 수행하기 위한 기술개발과 인력양성의 수요는 당시 북해도 개발의 거점도시였던 삿포로시에 대한 대학 설립의 명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을 업고 홋카이도 대학은 학생 24명으로 1876년 삿포로농학교[札幌農學校]로 문을 열었다. 이후 20세기에 접어들어 도호쿠 제국대학과 홋카이도 제국대학 농과대학을 거쳐 패망 직후인 1947년 종합대학으로서 편제를 갖춘 채  홋카이도 대학으로 교명을 변경 후 학생수 15,000명에 달하는 현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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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대학의 기원이었던 농과대학 건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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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초기의 모습을 잘 간직한 농대건물 인근에는 “Boys, be ambitious”로 유명한 윌리엄 클라크 박사의 동상이 있다. 그는 메사추세츠 농업대학 재임시절 삿포로농학교 초대 부학장으로 1년간 부임해 설립 초기 학교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하는데, 특히 삿포로를 떠나며 남긴 “소년이여, 야망을”이라는 명언은 당시 일본 젊은이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말은 아마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한일강제합방과 대동아공영권 주장 그리고 2차 세계대전까지, 어쩌면 일본 젊은이들에게 빗나간 야망마저 끈질기게 추구하게 만든 하나의 불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클라크 박사 턱밑에 새겨진 그의 말 한 마디가 고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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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클라크 박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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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년을 자랑하는 역사 덕에 캠퍼스 곳곳에 산재된 나무들은 저마다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대학본관을 중심으로 캠퍼스의 남과 북을 잇는 메인도로는 커다란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있어 가을이면 노랑 단풍으로 채색되어 이 일대는 보나마나 장관일 듯하다. 나는 곧장 본관건물을 돌아 은행나무길과 함께 홋카이도 대학의 또 다른 명소인 포플러 애비뉴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넉넉히 걷기 좋은 폭의 길 양쪽으로 웅장한 포플러 나무들이 사열해 있는 곳이다. 초록초록 싱그러울 포플러길을 상상해보니 이 곳 역시 연인들의 성지일 것임에 분명하다. 이른 아침, 세상 하얀 눈길을 걷고 있는 나 역시 갓 스물 연인에게 뒤지지 않을 이 행복감을 기억회로에 촘촘히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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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 다소 볼품없어 뵈는 포플러 애비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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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 가도 양옆으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쌓인 눈 위로 삐죽 튀어나온 철재 지지대들로 미뤄보아 연구용 작물을 재배하는 농과대학 소속의 실습농장인듯 하다. 여기 눈 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새하얀 여백은 소매가 짧아지는 속도에 맞춰 진한 초록으로 채색되어갈 것이다. 1936년 세계 최초로 인공설을 만드는 데 성공한 이 대학 물리학과 교수 나카타니 우키치로(1900~62)는 ‘눈은 하늘에서 보낸 편지’라는 말을 남겼는데, 연구실 창문너머 설경을 감상하던 그에게 하늘이 보내는 편지는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한 사랑의 메세지였음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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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그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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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를 조금 넘긴 시각, 캠퍼스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그렇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여행자의 엉터리 날짜감각을 정정하며 어제와 다를 것 없을 그들의 일상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내일이면 오늘과 다른 일상의 쳇바퀴로 돌아갈 나 자신에게도 어깨 토닥토닥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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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aken with ilford hp5+

 

효자동

추운건 딱 질색이다.

거짓말 안보태고 1년에 한여름 석달 빼고는 그늘에만 들어가도 한기를 느끼는 체질 탓에 나는 겨울이 가장 싫다. 늦가을만 되어도 내복 꺼내입기 시작할 정도니 내 생각에도 추위 참 많이 탄다. 그렇다. 내 사전에 목욕탕 냉수마찰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사진을 좋아하면서부터는 해마다 겨울이되면 의례히 보이는 설경사진들이 어찌나 멋있는지.. 모니터 너머 꿈같은 풍경들을 한번이라도 찍어볼 수 있다면 뽈때기 터질듯한 추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포항은 꽤나 따뜻한 편이다. 서너해 건너 한번씩 폭설이 오기도 하지만 바로 윗동네인 강원도에 비하면야 눈이 귀한 동네다. 설령 운이 좋아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 코튼으로 씌워놓은 마냥 하얀 어느 겨울 아침이라 하더라도 출근을 해야하는 평일인 경우가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설경촬영은 그저 나랑 1도 관계없는 그러니까 눈이랑 친한 동네에 살거나 혹은 삶이 여유로운 이들의 전유물일 뿐이었다.

아랫배가 땡겨 화장실 가려 일어난 어느 겨울 새벽, 창 밖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파리한 빛이 평소의 그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특별한 감각의 정체를 확인하러 창으로 다가가니 이미 세상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오늘이 무슨요일이지? 그렇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이내 방한채비를 단단히 하고 효자동에 내린 간달프의 마법을 카메라에 수집하기 위해 현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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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데다 이른 시각 탓에 도로를 서행하는 차량 몇 대를 제외하고는 인기척이 없다. 동녘에서 고개를 드는 노오란 햇살이 효자동 골목에서는 어느 담 어느 건물이 높고 낮은지 키재기 경연을 벌이고 있다. 익숙하디 익숙한 효자동은 순백의 화장으로 낯설었다. 철길 건너 만물수퍼 앞 비질하는 아저씨 그리고 설경에 신난 동네 똥개를 모델로 대여섯 컷을 눌렀다. 필름 카운터는 어느새 36을 가리켰다. 잘해야 2컷 더 찍을 수 있으리라. 숄더백에 든 여분의 필름에 안심이다.

한창 공사중인 테라스하우스를 올려보며 한 롤을 마저 찍은 후 영일대 호텔 쪽으로 넘어간다. 필름을 교체하기 위해 잠시 멈춰 하판을 열었는데 바디 내부가 눈에 익은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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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순간 등줄기가 찌릿함을 느끼며 신속하게 하판을 다시 닫았다. 다 찍은 필름을 리와인드도 하지 않은 채 오픈해 버린거다. 대체 얼마나 그리고 어디까지 노광된걸까? 한 겨울 눈길 위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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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겠냐. 이 멍청아.

잠시 간의 자책과 함께 필름을 되감은 후 새 필름을 로딩했다. 한 롤 촬영이 마치면 잡생각말고 되감기부터 해 놓는 습관을 들이기로 다짐하하고는 새 마음으로 촬영을 재개했다. 심란한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 위에 어지러이 난 타이어자국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고요한 아침이다. 점점이 뒤뚱뒤뚱 걷는 이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검은 계열의 두터운 겨울 옷을 입은 사람들은 설경 위에서 훌륭한 포인트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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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대 호수의 설경을 두 눈으로 듬뿍 안는다. 얼어붙은 호수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각양의 나무들은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풍경을 선물해주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눈 앞 풍광을 턱없이 부족한 뷰파이더로 잘라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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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간은 8시를 넘어 겨울해가 꽤나 올라섰다.

작은 소녀가 자기 키 만한 빗자루를 들고 눈 쓰는 모습이 귀엽다. 함께 있는 아이 아빠의 허락을 구해 사진을 찍었다. (후에 메모해두었던 메일로 보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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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동에 펼쳐진 마법은 골목소녀를 끝으로 해제되었고 얼마 후 걱정반 포기반의 마음으로 문제적 필름을 현상해보았다. 다행히 결과물은 네거티브의 부처핸섬 관용도 덕에 새까맣게 타지 않은 채 녹지 않는 눈의 마법처럼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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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그리고 귀농

5년 전 아버지께서 정년 퇴임을 하셨다.

30년 이상 중,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교장직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시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은퇴 후 뾰족한 계획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아들 내외가 지내는 포항으로 이사를 오셨고, 손자 보는 재미 그리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 계모임 등으로 한가한 일상을 보내기 시작하셨다.

그런 느슨한 시간으로 1년이 흘렀고, 아버지는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늙으시는 것 같았다. 엄마 말로는 약속 없는 평소에는 10시까지 늦잠을 주무시다가 소파에서 신문이나 티브이를 보시고, 식사 후에 잠시 산책하다 들어오면 다시 티브이를 보거나 누워계신다 하셨다. 살도 많이 찌셨고 검은 머리는 일부러 흰머리를 심으시는 것처럼 급격히 하얗게 변해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보다 에너제틱한 삶을 위해서 수영도 권하고 취미 활동 역시 추천해 드려봤지만, 아버지의 무료한 은퇴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촌에 놀고 있는 밭에다 뭘 좀 심어볼까 고민 중이라며 혹시 ‘아로니아’가 어떨까 하고 물어오셨다. 4년 전인 그때만 해도 ‘아로니아’라는 과일은 생경했었고, 처음 듣는 과일 이름인 탓에 검색해보니 연결된 주요 키워드가 무려 수퍼푸드, 노화 방지, 항암효과, 항산화의 끝판왕 같은 것들이다. 아 이게 뭔가 건강에 굉장히 좋은 건가봉가 했다. 아버지는 농업 관련 서적도 탐독하시고 작물 재배 관련 카페에 가입하시며 아로니아 공부를 묵묵히 해 나가셨고, 이듬해 덜컥 아로니아 묘목을 1000그루 남짓 심기에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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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없이 잘 자랄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잠시, 질 좋은 토지와 햇볕에 바지런한 농부의 땀이 더해지니 땅에 꽂힌 꼬챙이 같던 모종들은 여러 갈래 무성한 덤불로 착실히 성장해 나갔다. 보통은 심은지 3년째는 되어야 제대로 수확한다고 하는데 2년 차였던 작년에 벌써 작지 않은 양을 수확할 만큼 아로니아가 일찍이 자리를 잡아가니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초보 농부인 부모님께서는 내심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로니아 수확 3년 차인 올해엔 농장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좀 찍어두겠노라 결심했다. 무거운 거 들고 나르는데 옆에서 카메라 깔짝거리는 게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소중한 순간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지금 남기지 않으면 후회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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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이른 첫 수확에 이어 올해는 제대로 풍성할 모양이라며 가지마다 촘촘하게 달린 연두색의 설익은 열매를 매만지신다. 못 보던 과수 운반용 전기수레도 어디서 구해오셨다. 3년 차 농부 아버지는 은퇴 직후의 푸석함을 완전히 벗으시고 또래의 누구보다 탄탄하고 여물어 보이신다. 체중도 적당히 유지하시고 매 끼니 밥맛도 좋다 시니 아들 기분이 참 좋다. 자고 일어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가치는 건강한 삶을 담보하는 중요한 전제조건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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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아로니아 생과 수확은 7월부터 8월까지 한 달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데 8월 첫째, 둘째 주가 아주 피크다. 이 기간은 그야말로 온 가족 동원령이 떨어지는 터라 서울 사는 여동생도 내려와야 하고 아이들은 ‘농촌체험 활동’ 삼아 고사리손까지 보탠다. 보통 열사를 피해 새벽같이 일어나 너덧 시간 작업하고 살을 태울듯한 대낮에는 그늘에서 열매를 다듬다가 늦은 오후로 넘어가면 접수된 주문 확인하여 택배를 부치는 일이 반복되는데, 노동의 강도가 장난 없어서 동원인력 중 체력이 가장 좋은 나마저도 며칠 만에 곡소리를 냈다. 노동의 강도가 이렇다 보니 당연히 부모님 체력과 건강이 무척 걱정되던 차에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몇 주 내내 묵묵히 일하시던 엄마한테 대상포진이라는 고통스러운 놈이 와버렸다. 어질어질한 현기증에 몇 번 넘어질 뻔도 하셨는데, 증상이 두통이다 보니 두통약과 진통제 처방으로 며칠 버티셨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도 약이 듣지 않아 종합병원을 가셨는데 알고 보니 달팽이관 신경 쪽으로 발생한 대상포진이라 균형감각에 문제가 있었다. 엄마는 곧장 입원하셨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3~4일 안정을 취하면 나을 정도로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 그리 말씀을 드렸건만.. 병원 첫날에는 끼니도 힘겨워하시던 엄마였지만 링거액과 충분한 잠으로 다행히 금방 기력을 회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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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은 귀향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은퇴 세대의 아내들은 남편 따라 시골로 들어가는 걸 감옥살이 버금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는데 도시가 고향인 엄마는 아버지를 따라 순순히도 촌구석으로 들어가셨고 당신 몸 돌볼 생각도 않은 채 힘든 농사일로 무리까지 하셨다고 생각하니 곁에서 챙기지 않은 아버지가 야속하기도 했다.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버지는 일꾼을 부려 남은 일을 거의 마무리하셨다. 엄마가 입원하는 해프닝까지 겪으며 어렵게 써 내려가는 2017년의 귀농일지.. 하지만 퇴원 후 다시금 건강한 웃음을 되찾으신 어머니와 은퇴 후 퍼석한 삶에 빠지셨던 아버지의 건강한 변신만은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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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깨 너머로 20년 뒤 내 모습을 잠시 그려본다. 나도 아버지의 땅에서 무언가를 심고 있을까? 사진과 나는 어떤 사이일까?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혼자 피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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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쇼지사진미술관

 

일본여행 마지막 날 아침, 숙소를 나선 우리는 요나고로 향했다.

천하태평 완행열차를 탄 덕에 사카이미나토 역에서 요나고 역까지 50분이나 걸렸다. 역 앞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때운 우리는 미리 조사해 둔 버스 시간표에 따라 10시 20분발 다이센 루프버스를 탔다. (하루 10회 운행하며, 봄/여름/가을 시즌제로 운행하므로 미리 운영 여부와 시간 체크) 다이센 루프버스의 주요 코스는 ‘요나고역 – 다이센지 – 다이센목장 – 우에다쇼지미술관 – 모리노쿠니 – 요나고역’으로 다이센산 기슭에 자리한 주요 관광명소를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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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을 출발한 버스는 이내 요나고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접어들었다. 왕복 2차선 시골도로 주변으로 펼쳐진 논과 밭은 8월의 건강한 녹색으로 빛난다. 10분 남짓 더 달렸을까. 어느새 우리는 울창한 숲속으로 진입하였다. 창문을 살짝 열고 울창한 나무와 함께 건강한 호흡을 몇 번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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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도 화창하던 날씨는 환승지점인 다이센지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폭우가 퍼부었다. 버스정류소에 발이 묶인 채 우산이라도 사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비는 차츰 잦아들더니 저 너머 빼꼼히 해까지 보인다. 높은 산 중턱이 부린 변덕이었나 보다.

여행은 다시 시작되고 우리는 다이센목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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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센목장에서 점심을 먹은 후 소문난 밀크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하며 다음 일정을 논의했다. 원래 계획은 우리 셋 모두 우에다미술관에서 한 시간 관람하고 감바리우스에 들러 수제 맥주 한잔 걸친 후 요나고 역으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일정을 바꾸면 어떨까하고 제안했다. 우에다미술관에 1도 관심이 없던 아내와 아이였는데 루프버스 오는 길에 ‘모리노쿠니(森の国)’라는 자연체험 테마파크(?)를 보고서는 미술관 대신 거기서 놀고 있을 테니 나더러 2시간 미술관 혼자 관람하고 모리노쿠니로 와서 합류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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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극한 성은은 거두기 전에 낼름 받아먹어야 하는 법. 올레 앗싸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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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센목장을 출발한 나는 우에다쇼지미술관에서 하차했고, 아내와 아들은 루프 버스에 남아 모리노쿠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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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바로 우에다쇼지사진미술관의 첫 인상이었다.

절제된 선과 면을 이용해 조곤조곤 공간을 분할하며 착실히 그려 놓은 펜화 같은 풍경이다. 1995년에 개관한 이 곳은 우에다 쇼지(植田正治)의 대표작인 소녀사태(少女四態)를 모티브로 건축가 다카마스 신(高松伸)이 디자인했으며, 그의 사진 15,000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정면에 보이는 네 개의 박스가 네 명의 소녀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버스정류장에서의 관점으로는 창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에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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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사태(少女四態) ©우에다 쇼지,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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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종종 자신이 품고 있는 예술품 못지 않게 예술적인 경우가 많다.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이 그러하고 우리 가까이 승효상의 솔거미술관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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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미술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사실 내겐 우에다의 사진보다 다카마스의 건축물이 좀 더 매력적이었음을 고백한다. 친근한 피사체를 주어진 프레임 내에 재치있게 배치한 우에다의 명석한 사진이었지만, 그의 사진을 관통하는 연출적 요소는 결국 나의 테이스트완 결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미술관에 머문 두 시간 동안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한 시간은 30분을 채 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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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고 또 걸었다. 크지 않은 미술관이지만 기둥 하나, 창문 하나 놓칠새라 안과 밖을 쏘다니며 욕심스레 눈에 담고 또 담았다. 반듯하고 절제된 콘크리트의 육중한 직선과 다이센산의 자연을 허심탄회하게 실내로 들여오는 과감한 윈도우는 건축가의 조율아래 기가 막히게 균형을 이루며 관람자를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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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인지방에서 나고 자라며 평생 산인지방의 자연과 사람을 담아 낸 사진가 우에다 쇼지. 전날 돗토리 사구에서 만났던 전설은 다이센산 기슭에 터를 잡은 채 견고하게 전승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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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떠나기에 앞서 잠시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아쉬움을 우에다와 함께 한 이 사진 한장으로 달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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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이용원

대성이용원

센텀 이전의 수영비행장 시절부터 쭈욱 이어져온 꽤나 오래된 이용원
그땐 군인들 머리를 그렇게도 많이 만지셨다는데, 지금은 동네 단골 아저씨  몇 분만 들락거릴 뿐이다.

처음에 이 이용원을 알게 된 것은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이다.
천방지축 개구쟁이 1학년 아들을 아침저녁으로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을 눈에 담게 된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다.
나는 아주 가끔 일이 빨리 끝난 날 아이를 데리러 가는데 동참하곤 했다.

우리 집에서 나와 건널목을 건너면 바로 접하게 되는 곳이 신흥반점과 나란히 붙어 있는 이 대성이용원이다.
이 신흥반점도 해운대 우동에 오래 사셨던 분들 말로는 꽤나 맛으로 유명하다 했는데 우리는 아직 시켜먹어 보진 못했다.

신흥반점은 항상 문이 굳게 닫혀있어 배달전문 중국집임을 티 내는 듯했으나,
그 옆 대성이용원은 항상 문이 열려있고 발이 바람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틈으로 얼핏 보이는 것이 서서 머리를 감는 타일욕조와 바가지가 담겨져 있는 빨간 다라이

이 얼마나 오랜만에 보던 풍경인가.
중학교 시절 학교 앞 단골 이발소가 꼭 이런 모양이었다.
지금은 다들 전기바리깡을 사용하지만 우리 때는 손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었다.
가끔씩 바리깡에 머리가 씹히면 어찌나 아프던지 “아야”하고 소리를 내면
이발소 아저씨는 엄살피지 마라며 꿀밤을 먹이시곤 하셨는데……

그때의 그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런 이발소가 아직 있다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산의 대표적인 도심공간인 센텀에 이런 오래된 이용실이 있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그런데 내 눈에만 반갑고 신기한 곳은 아니 였나 보다.
우리 아이가 어느 날 이곳이 궁금하다며 한번 들어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

나는 옳다구나 이때 구나를 속으로 외치며
“그러면 너 저기서 머리 손질해야 하는데 엄마랑 미용실 안가고 저기서 머리 깎을래?” 라고 물어 봤다.
‘응” 너무나 간단하고 명확하게 대답을 한다.

그 주 일요일 오후 드디어 대성이용원에 우리 세 식구 총 출동을 한다.
이발소 아저씨랑 사모님이랑 손님 한 분이 오잉? 요 사람들 뭐지? 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본다.

꼬맹이를 앞세우며 “요 녀석 요기 앞에 초등학교에 이번에 입학했는데 요기서 머리 깎고 싶다고 해서 왔습니다.”
하며 인사드리니 ” 그래 미용실에서는 파마만 할줄알지 그냥 사내 머리는 잘 못짤러”라며 반겨주신다.

능숙한 손짓으로 어린이용 보조의자를 이발소 의자에 걸치시며
“여기 와 앉아 보거래이, 아빠가 올려줘야겠네”
머리를 자르시다가 나를 힐끔 한번 보신다.
“아..저..결국 남는 건 사진 뿐이더라고예, 옆에서 쫌 찍어도 되지예?”
“그라면 뭐 그라던가”
옆에 계시던 사모님께서 거들어 주신다.
“맞다 낸중에 보면 사진빡에 없다. 마이 찍어가소”

그렇게 몇장의 기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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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 / 35cron asph /  hp5+ 1stop push / D-76 self-dev. 16’30” / epson4870

 

 

 

 

 

 

 

 

 

 

 

 

Topogon의 영혼 / Orion-15 28mm f6.0

▶ Orion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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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코파이, 포카칩, 고래밥, 오감자 따위가 떠오른다면 당신은 지극히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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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잡는 대잠초계기 P-3C ORION이 생각난다면 당신은 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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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자리가 떠오른다면 당신은 천체나 신화에 관심이 많은 고상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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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면, 당신은 환자! ㄷ 환자들을 위한 오리온에 대한 글을 써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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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de in U.S.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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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츠와 자이스이콘(칼 자이즈)이라는 막강 원투 펀치로 대표되는 독일 업계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던 당시 여러 나라의 여러 군소업체들은 그 나름의 방식대로 수많은 카메라와 렌즈를 생산하며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당시의 제품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거래되고 있는 것들은 소수에 불과한데 그 중에서 소련제 카메라와 렌즈들은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로 남아 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 당시에 제대로 된 카메라와 렌즈를 제조할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았다. 비록 업계를 선도하는 기술력을 보유하지는 못했지만 제법 괜찮은 성능의 제품을 대량으로, 그리고 저렴하게 찍어낼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가진 가장 큰 무기였다. 게다가 라이카와 콘탁스를 카피한 제품들을 출시했기에 구하기 어렵고 가격이 비싼 올드 라이카와 콘탁스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오늘날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중에는 독일제 카피가 아닌 독자적인 설계로서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녀석들도 있었는데 비오곤과 슈퍼 앵글론에 앞서 등장한 Russar 20mm가 그러하고 오늘 리뷰하려는 Orion-15 28mm 역시 손에 꼽을 수 있는 렌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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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rion-15 28mm f6.0 : 소비에트 Topogon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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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동부전선의 소련군이 독일군을 점차 서쪽으로 밀어내고 있던 1944년. Orion-15라는 새로운 28미리 렌즈의 프로토 타입이 등장했다. 온 국토가 그야말로 초토화된 소련에서 정신없는 전쟁의 와중에도 새로운 민수용 렌즈가 연구 개발되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 호기심을 자아냈던 것은 이 렌즈의 특이한 설계 방식때문이었다. Orion-15는 Carl Zeiss가 선보였던 4군 4매 좌우대칭의 Topogon 설계를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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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 28mm f/6.0의 설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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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의 설계는 결국 수차와의 싸움인데 다양한 수차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많은 매수의 렌즈를 투입해 보정해야 하지만 코팅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렌즈 매수의 증가는 결국 투과율 저하로 인한 해상도, 콘트라스트의 저하와 내부 난반사로 이어지는 문제가 있었고 결국 최소한의 렌즈로서 최대한 수차를 억제하는 것이 성패의 관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Tessar나 Elmar같은 3군 4매의 단순한 렌즈들이 당시 기준으로 우수한 해상도와 콘트라스트를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Topogon은 정확한 좌우대칭 구조를 통해 광각렌즈에서의 왜곡 수차를 극도로 억제할 수 있었고 4군 4매라는 적은 렌즈 매수 덕분에 해상도와 콘트라스트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렌즈의 높은 곡률로 인해 구슬과도 같은 렌즈알을 정밀하게 가공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자칫 주변부의 해상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비네팅이 심하게 발생하기 쉬웠다. 이러한 이유로 단순한 구성에 비해 생산이 쉽지 않았던 것인지 Topogon타입을 개발한 Carl Zeiss조차 Topogon 25mm f4.0를 대량으로 생산해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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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의 전설 Carl Zeiss Jena Topogon 25mm f/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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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1944년에 소련에서 이러한 Topogon 설계를 적용한 Orion-15를 개발했다는 점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Topogon의 본가 Carl Zeiss와 달리 소련의 광학 기술에는 한계가 느껴지는데 Orion-15가 비록 Topogon 설계를 따랐다고는 하나 렌즈의 단면도를 보면 날렵하고 얇게 만들어낸 오리지날 Topogon과 달리 상당히 두툼하고 곡률도 낮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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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면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주변부의 성능도 본가의 명성에는 도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화각이 다르긴 하지만 Carl Zeiss의 Topogon은 25mm에 f4.0을 달성한 반면 Orion-15은 28mm에 f6.0에 머물고 있다. 물론 당시 Carl Zeiss의 Tessar 28mm가 f8.0, Leitz의 Hektor 28mm도 f6.3에 불과했으니 Orion-15의 f6.0은 그 자체로는 큰 문제는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이 6.0이란 개방수치는 소련제 토포곤의 한계로 인한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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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히 열리지 않는 조리개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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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를 살펴보면 최대개방 상태에서도 조리개가 모두 열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도 한참이나 더 열릴 것 같은데 f6.0이 최대 개방으로 멈춰지게 만들어져 있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일부 환자분들께서 직접 개조를 해본 결과 f2.8 정도에 해당하는 값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셨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강제로 개방값을 확장했을 경우 사실상 중앙부를 제외하곤 쓸 수 없는 수준의 화질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Topogon 구조의 특성상 주변부 화질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고 앞서 언급하였는데 Orion-15를 개조해 완전히 개방해보면 그 같은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물리적으로 가능한 최대 개방에서의 화질은 형편없는 수준이었기에 ‘의미없는’ 최대개방값은 포기하고 ‘사용가능한 수준’의 최대개방치에 맞춘 것이 f6.0이었던 것이다. f4.0에서도 조리개가 거의 다 열리는 Carl Zeiss의 Topogon과의 기술 격차를 엿보게 해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어쨌든 이 같은 선택으로 결론적으로 렌즈 설계의 결점이 감춰질 수 있었고 원래 6.0부터라 생각하고 사용하면 전혀 문제는 없는 부분이긴 하다(응?). 이미 충분히 조여진 상태를 최대 개방으로 ‘표기’하다 보니 1스탑만 조여도 최대 해상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는 장점도 있고 최대개방시에도 비네팅이나 주변부 화질 저하가 적다. (뭔가 크롭바디에 풀프레임 렌즈를 꽂은 느낌이..)

그러나 Topogon타입에서 이런 꼼수(?)를 쓴 것은 Orion-15 뿐은 아니었다. 50년대에 Topogon타입에 매력을 느낀 니폰고가쿠와 캐논도 이런 렌즈를 출시하게 되는데 이들은 보다 Carl Zeiss Topogon 설계를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여 화각도 동일한 25mm로 출시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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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폰고가쿠의 W-Nikkor 2.5cm f4.0은 렌즈 단면도에서부터 오리지날 Topogon의 향기가 강하게 난다. 같은 25mm 화각에 최대 개방값도 f4.0으로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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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K.님의 W-Nikkor 2.5cm f4.0 L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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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렌즈 역시 최대 개방시에 조리개가 살짝 덜 열린다. 물리적으로는 f3.5 이하의 개방값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W-Nikkor도 f4.0에서 멈췄다. 당시 독일 렌즈보다 더 밝게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일본 기술진들이 토포곤을 뛰어넘자고 덤볐다가 한계에 부딪히자 역시 f4.0으로 리밋을 걸어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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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에서도 Topogon 타입 25mm f3.5를 출시했다. 니폰고가쿠와 달리 칼자이즈보다 조금 더 밝은 개방값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역시 조리개날이 완전히 열리지는 않는다. 사실 이 렌즈는 Topogon타입의 변형인데 완벽한 좌우대칭 4군 4매가 아니라 후면의 2매가 조금 더 크고 아주 특이하게도 맨 뒤에 평면유리가 자리하고 있다. 저 평면유리의 역할이 무척 궁금했는데 Goliathus님의 실험에 따르면 저 렌즈를 빼고 촬영하면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고.. 어쨌든 이 렌즈는 순수한 Topogon 타입으로 보긴 어렵겠지만 그리 많지 않은 형식이니 끼워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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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날의 위엄. Carl Zeiss Jena Topogon 25mm f4.0의 경우 짝퉁(?)들과 달리 최대개방에서도 조리개가 거의 대부분 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 quanj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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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rion-15 의 두가지 타입, Contax Mount & M39 M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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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 브로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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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는 프로토타입이 등장할 1944년 당시 콘탁스용 베이요닛 마운트로 설계되었다. 소련이 콘탁스 마운트 렌즈들을 본격 양산하게 되는 시기는 1948~9년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예나와 드레스덴의 칼자이즈와 자이스이콘 콘탁스 생산 라인을 뜯어간 후 부터인데, 따라서 Orion-15를 개발할 당시 소련제 카메라 중 콘탁스 마운트를 적용한 제품이 없었음에도 왜 굳이 콘탁스용 마운트로 설계했던 것인지 다소 의아하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소련에서 콘탁스 마운트로 제작한 첫번째 렌즈가 Orion-15일 가능성이 높다. 아쉽게도 현재 콘탁스 마운트 버전 Orion-15 매물은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운데, 오늘날 콘탁스 유저가 극소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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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 프로토 타입(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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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에는 드디어 M39(LTM) 마운트 버전이 출시된다. 이로써 자국의 조르키나 페드에서도 Orion-15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서방세계로 수출도 이루어졌다. 물론 당시엔 Summaron 28mm f5.6이 등장하던 시기라 듣보잡 못난이 Orion-15 따위가 고급진 라이카 유저들의 눈에 찰리는 없었겠지만 Orion-15의 출현으로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비싸기만한 주마론의 가격 대비 20% 미만의 비용을 지불하고도 바르낙에서 28미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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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 28mm f6.0(L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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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l Zeiss Jena Tessar 2.8cm와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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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의 두가지 버전(Contax용과 LTM용)의 디자인을 살펴보면 꽤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두가지 모두 Carl Zeiss Jena Tessar 2.8cm의 외관과 꼭 닮았다는 점이다. Carl Zeiss Jena Tessar 2.8cm는 세계 최초의 28미리 렌즈로서의 영혼과 상징성을 갖는 렌즈인데 Contax 마운트로만 제작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 LTM 버전도 생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2차대전 중 칼 자이즈는 콘탁스용 교환렌즈들을 LTM 버전으로 생산하기도 했는데 그 중 Tessar 2.8cm는 관련 자료나 사진을 거의 보질 못해서 존재를 몰랐다. 이베이에서 출현한 매물과 가뭄에 콩 나듯 검색에 걸리는 몇몇 사진들을 검토해본 결과 짝퉁이나 개조 버전은 아닌거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각각의 버전 사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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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Zeiss Tessar 2.8cm f8.0 (for Cont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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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Zeiss Tessar 2.8cm f8.0 (L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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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위아래로 왔다갔다 비교해보면 Orion과 Tessar는 정말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에서 Fed 28mm를 개발할 때는 Leitz Hektor 28mm를 카피했고 Orion-15를 개발할 때는 Carl Zeiss Tessar 2.8cm를 카피했던게 아닐까. 외관은 거의 그대로 베낀반면 렌즈 구성은 3군 4매의 테사 형식에서 4군 4매 토포곤 형식으로 변경됐다. 아마 좀 더 밝고 왜곡이 적은 설계를 적용하려 했던 것이리라. 어쨌든 LTM 버전 Tessar 2.8cm의 존재를 확인하고 났을 때 비로소 Orion-15의 헤어진 엄마를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네가 그냥 못생긴게 아니었고 근본있는 못생김이었구나!’ (결국 소련 잘못이 아니라 독일애들이 잘못한거였..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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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pogon의 영혼을 이어간 Orio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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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이후로는 렌즈 제작 기술이 더욱 발달하면서 수차를 보정하기 위한 보다 많은 매수의 유리가 들어가고도 코팅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며 더이상 제조가 까다롭고 밝은 개방값을 갖는데 한계가 있는 Topogon 타입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Topogon의 명맥은 끊어지게 되었지만 광학적 성능의 발전과는 별개로 구슬같이 아름다운 Topogon 타입에 대한 매니아들의 호기심과 열정은 유별나, 몇 안되는 종류의 Topogon 타입 렌즈들은 여전히 비싼 가격을 자랑하고 있고 물건도 귀해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는 손에 넣기가 쉽지 않다.

그런 반면 1944년 프로토타입이 처음 등장한 이후 1978년까지 지속적으로 생산된 Orion-15는 화석이 될뻔한 Topogon의 생명력을 유지해준 최후의 계승자가 되었다. 생산 기간이 길었던 만큼 여전히 많은 개체가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LTM용 28미리에 절대 강자가 없는 현실에서 200불 내외에 구입할 수 있는 Orion-15는 Topogon 타입을 즐겨보고 싶은 애호가들에게 상당히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Orion-15가 이렇게 오랜 기간 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꼭 성능의 우수함이나 소비자들의 선호에 기인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시장에서의 경쟁이 사라진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에 더 큰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다. 긴 생산 기간에도 불구하고 성능상의 개선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피터 계열 렌즈들은 후기형으로 갈수록 그나마 코팅이라도 두터워지는데 반해 Orion-15는 초기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블루 계열의 싱글 코팅이 계속해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불편한 조리개 조절 방식과 어두운 개방값도 그대로였고 못생긴 외형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이 렌즈가 주마론처럼 예뻤다면 지금 중고가격이 저렇게 싸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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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Z에서 ZOMZ로 제조사가 바뀌면서 렌즈 형태가 다소 바뀌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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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발전이 더뎠던 탓에 후기형의 메리트는 크지 않아 대부분의 소련제 렌즈들이 그러하듯 Orion-15 역시 50년대~60년대 초반까지의 제품들이 인기가 높다. 비교적 품질 관리가 우수했으리란 믿음 때문인데 개인적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그런 이유보다는 KMZ 생산 60년대 초반 제품까지만 붉은 색 ‘n’코팅 마킹이 있어서 보기에 더 예쁘기 때문이다. (칼 자이즈 렌즈의 T코팅 표기와 같은 느낌) 이왕이면 영혼이 느껴지는 50~60년대초반 개체를 구하고 싶었으나 Jupiter-12와 달리 Orion-15는 이 시기의 매물이 많지 않고 있다해도 상태가 좋은 것이 드문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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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영혼있는 ‘n’마킹이 있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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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가득 볼매 Orio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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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는 사실 보고 만지는 재미가 쏠쏠한 렌즈는 아니다. 개체수도 많은 편이라 소장가치가 높은 것도 아니고 알루미늄 경통은 표면이 부식되거나 때를 타 지저분한 물건이 많고 디자인도 단순 무식하기 짝이 없다. 냉장고를 뜯어서 만들었다는 우스갯 소리가 괜한 것이 아닐 정도로 못생긴 외모에 경악하곤 한다. 게다가 소련제 저질 윤활유로 인해 초점링의 조작감도 고급스럽지 못하다. 물론 윤활유야 수리실에 맡겨서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10~20만원 정도 주고 산 싸구려 렌즈에 돈을 들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쓰다가 싫증나면 팔고 산 사람도 ‘소련제가 이렇지 뭐.’ 하면서 계속 그 상태로 돌고 도는 경우가 많으니 안타깝다.

그럼에도 이 렌즈에는 볼수록 묘한 매력이 있다. 들고 나갔을 때 폼 나지도 않고 귀한 걸 갖고 있다며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일도 없는 렌즈, 아니, 대부분의 이들이 ‘그런 렌즈도 있냐? 잘 나오냐?’ 정도의 약간의 호기심만 표현할 뿐 관심조차 사지 못하는 렌즈인데도 말이다.

못생긴 외모와 저렴한 가격은 이 렌즈를 객관적으로 논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생긴게 못생겼으니 흥미를 갖지 않고 가격을 듣고는 ‘뭐 싸네. 사진은 그럭저럭 나오나보네.’ 정도의 반응을 넘어서는 사람도 많지 않다. 비록 못생겼어도 만약 이 렌즈가 오리지날 토포곤 처럼 비쌌다면 반응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비싼 렌즈를 좋다고 하기는 쉽지만 싼 렌즈를 좋다고 얘기하는 것은 꽤나 힘들구나 라는 걸 이번 리뷰를 쓰며 절실히 느끼고 있다. 문과 출신이라 아는 것도 없고 객관적 테스트를 나열하며 리뷰를 쓰는 체질도 아니라 글로만 떼워 왔었는데 나 부터도 이번 리뷰는 그런 것들을 들먹이며 써야하지 않나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이거 정말 좋아요!’ ‘어 그래 안좋은 렌즈 있나.’ 이런 무미건조한 반응을 방지하려면 ‘오 그래요?’ 하는 리액션이 나올만한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데이터가 나오는게 별로 없다. 그래서 결국 이번 리뷰도 이렇게 글로 떼우다가 끝내긴 하는데.

사실 사진을(카메라를?) 취미로 하면서 가성비만 찾는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오리온이 싸고 좋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생각은 없다. 싸고 좋은 렌즈는 얼마든지 많으며 싸다고 해서 수십배에 달하는 가격의 라이카 렌즈와 비교해 그 품질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싼 맛에 쉽게 살 수 있는 렌즈에 대한 호기심과 만족도는 금세 시들게 마련이다. 결국 소유에 따른 만족감은 렌즈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와 역사성, 그리고 적정수준의 희귀성, 즉 내가 늘 얘기하는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쿨럭, 렌즈에 무슨 영혼..) Topogon 형식이라는 이제는 다시 나올 수 없는 당대 최선의 설계로 만들어진 구슬과도 같은 앙증맞은 작은 렌즈알과 거기서 뽑아주는 왜곡 없는 시원한 이미지와 높은 해상도와 콘트라스트가 만들어주는 칼칼한 느낌. 이만하면 내 기준엔 충분히 소유할 가치가 있다.

못생겼네 어쩌네 이 렌즈를 깔 필요도 없다. 기껏해야 민트급 Irooa 후드 하나 가격밖에 안하는 렌즈에 미학적 완벽을 바라는 것부터 과한 욕심이다. Topogon의 영혼을 지닌 Orion-15, 근래 써본 렌즈 중 가장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싸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매력이 넘치는 렌즈다. (믿어주세요) 28미리 화각, 그리고 Topogon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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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자리의 사진을 다시 보니 Orion-15의 이름이 괜히 오리온이 아니란 걸 알겠다. Topogon의 특징이 좌우대칭이란 점에서 착안한 이름임에 틀림 없으리라. 렌즈 구조의 특징을 별자리에 빗대어 이름을 정하다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Summaron? 무슨 뜻임?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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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디와의 장착 샷 (못생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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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바디와 매칭하면 미친듯이 못생기진 않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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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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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만쉐이~!

 

Special Thanks to LEE T.Y.

 

 

※ 참고로 뒤적였던 자료들

https://en.wikipedia.org/wiki/Topogon

http://www.sovietcams.com/index.php?398258553

http://www.sovietcams.com/index.php?1740225226

http://www.marcocavina.com/articoli_fotografici/Soviet_and_wide_lenses_on_Leica_M/00_p.htm

 

 

 

필름, 라이카 그리고 일년

필름 시작한지 어느새 1년이 지난 것을 깨닫고는 새삼 놀랐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올라오는 걸 보니 디지털에서 필름으로 넘어 온 일년이 꽤나 즐겁긴 했나보다. 이미 필름 입문 100일 기념으로 한 차례 우려먹었던 터라 올챙이적 썼던 초반의 글은 생략하기로 한다.

  § 궁금하면 클릭 → “필름 그리고 라이카

일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겠지만, 사실 필름을 쓰기 전 내 사진생활은 어느덧 기억 속에서 너무나 멀어져 버렸다. 솔직히 흑백 필름에 이렇게까지 빠져들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주변의 지인들은 이런 나를 보고 적응하고 말 것도 없이 금방 필름에 익숙해졌다며 놀라워했지만 실은 시행착오와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오리발은 물 아래에서 조낸 저어대고 있었던 것..

그 와중에 사진만 찍으려는 나를 가만두지 않는 짓궂은 지인들은 끊임없는 뽐뿌와 감언이설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곤 했지만 내심 그 조차도 나쁘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선택과 집중으로 최소한의 것만 받아들이며 어느새 나도 8매가 뭔지 알게 되고 콘탁스가 어쩌네 자이즈가 어쩌네 귀에 담은 풍월이 제법 늘어갔다.

때로는 선문답 같기도 하고 때로는 저 무슨 한심한 시간낭비인가 싶기도 했던 환자들의 농담따먹기도 어느새 익숙해지자 한없이 가볍고 쓸데없어 보였던 그들의 ‘놀이’도 필름 사진과 올드카메라를 사랑하는 동호인 그룹만의 유니크 한 재미임을 알게 되었다. ‘놀이’라는 필터를 적용해보았더니 적어도 내 주변에 자칭 환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치고 진짜 환자들은 없었다. 장비질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사진에 대한 고민과 열정을 쏟았던 있는 이들이라는 걸  그들과 가까워 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영원히 쓸 것 같았던 렌즈를 바꿨다. 10년은.. 아니 평생 써야지 했던 헥사논은 1년도 되지 않아 집을 나가 주미크론으로 돌아왔다. 내년에도 주미크론이 내 곁에 있을지 장담할 순 없으나 어찌하랴?

Que Sera, Sera

 

 

호모 에렉투스 그리고 사진

요즘 관점에서 보면, 걷는다는 행위는 현대인과 무척이나 동떨어진 원시적 행위가 된 듯하다. 속도와 편리함에 익숙해진 우리는 걷는 것 자체를 고생스럽고 가능한 한 피해야 할 낭비적 행위로 규정한다. 어찌하면 덜 걸을까를 고민하고 부득이하게 주차를 좀 멀리해서 걸어야만 하는 상황이면 이내 짜증부터 내고 만다. 과거 대중교통이 발달하기 전 우리나라 사람들의 하루 평균 걸음 수는 3만 보였던 반해 최근에는 5천 보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특히,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 종사자와 학생들은 하루에 고작 5백보 정도 걷는다고 하니 건강을 위해 권고되는 하루 만보 걷기는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닌 듯 하다.

주지하고 있다시피 인간은 직립보행으로 자유로워진 두 손 덕에 문명을 구축하고 다른 동물들과 확연히 차별화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다. 네 발에 고루 분산하던 몸무게를 두 발로만 버텨내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커다란 도전이었을 것이나,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척추를 바로 세우고 뒷발의 구조를 변형함으로써 중력을 이겨내고 이족보행을 실현할 수 있었다. 아울러 두 발로 걷는 행위는 네 발로 걷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이동방법이다. 예컨대 네 발로 걷는 동물은 기본적으로 네 발 중 두 발은 항상 몸무게를 지탱하고 있어야 하고 전진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지면을 밀어주어야 하는데 반해 두 발로 걷는 우리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무게중심을 이동함과 동시에 넘어질 듯 발을 내딛어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에너지 손실이 네 발 동물에 비해 적다. 에너지 소모가 적다는 것은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과 함께 지구력과 직결된다. 이러한 지구력은 인간이 수렵생활을 할 때 가졌던 차별화된 강점으로 작용하였다. 창이나 화살로 쉬이 잡을 수 없는 사나운 동물이라 할 지라도 목표물이 지칠 때까지 꾸준히 뒤를 따르면 결국엔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의 출현으로 득템한 이족보행 능력으로 도구의 사용과 더불어 두뇌를 점차 대용량으로 발달시킬 수 있었고, 결국 현생인류가 누리고 있는 모든 문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모습은 어떠한가. 걷는다는 행위가 이토록 천대받을 줄 그 누가 알았으랴. 100만년 이상 자못 영웅적이었던 두 발에게 지못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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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측면에서 나는 현생인류보다 꽤나 원시적이라 할 수 있다. 평일에는 하루 만보에서 만 오천보, 주말이면 이만에서 삼만보까지 걷는다. 주말 아침, 2시간 정도 사진 찍고 오면 손목 만보계는 식전부터 8000보를 가리킨다.

튼튼한 두 다리는 내가 가진 최고의 사진장비이자 조력자임에 틀림없다. 지구 중력을 한발 두발 부드럽게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이따금 마음 가는 객체를 카메라에 채집하고 있노라면 도끼 썩는 줄 모르는 재미에 푹 빠지고 만다.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원시인류가 했던 수렵/채집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겠으나, 카메라를 메고 이미지를 채집하는 일은 분명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호모 에렉투스의 삶의 흔적과 공명하는 것이리라. 이처럼 걷기와 사진의 조합은 현대인이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원시체험이자 유전자가 기억하고 있는 수렵/채집에 의한 보상적 즐거움을 발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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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어느 주말, 가족과 단란하게 영천 치산계곡에 하루 묵으며 놀다 올 요량으로 짐을 꾸렸다. 우리 가족 모두 귀차니스트인 터라 텐트치고 코펠 따위로 요리하는 것은 극구 싫어하지만, 치산계곡에는 시에서 마련한 ‘카라반’ 캠핑장이 있기에 그리 많은 짐이 필요치 않다. 심지어 우리는 누구나 캠핑장에서 해야만 하는 ‘숯불피워 고기굽기’ 마저 게으름의 가치 아래 하지 않았다. 그저 간편하게 부대찌개랑 밥 지어 먹고는 후다닥 정리 끝. (그날 수십 개의 카라반 중 고기 굽지 않은 집은 우리 집 뿐인듯)

캠핑장의 시계가 빠른가 보다. 어느새 5시. 산이 깊은 곳이라 평지와 달리 석양이 지는듯 빛이 부드럽다. 해가 더 떨어져 어두워지기 전에 아들내미와 계곡 좀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수도사까지걸어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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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집의 기록 첫번째 : 2017.06.17, 17:30~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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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운동화 끈을 여며주고서 팔공산 산자락을 따라 난 길을 자박자박 걸었다. 나와 달리 지엄마 닮아 걷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녀석이라 나는 상금을 걸 수 밖에 없었다.

“목표지점까지 손잡고 잘 걸으면 천원!”

“콜”

아직 이게 먹히는 걸 보니 아직 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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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한 가뭄에 계곡물이 귀한 터라 예년 같으면 한 시즌 재미졌을 포장마차도 휴업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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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법 큰 규모로 찜질방 시설이 건립되다 자금난 때문이었는지 음침한 모습으로 굳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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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로를 닮아서인지 아이는 연신 이곳이 위험해 보인다며 아빠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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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찜질방을 지나자 허리 굽은 늙은 빛을 있는 힘껏 반사하고 있는 치산 저수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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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한 가뭄에 저수지 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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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지나지 않으면 아빠보다 더 클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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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디바위”라 명명하고 친히 공식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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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사까지 찍고 아들은 ‘천원 미션’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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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집의 기록 두번째 : 2017.06.18, 05:3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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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 아침 잠이 없는 나는 홀로 숙소를 나서 수도사까지 한걸음에 올랐다.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수도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647년 진덕여왕 때 자장율사와 원효대사 두 스님이 함께 금당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으며, 후에 원효대사께서 수도하셨다하여 ‘수도사’라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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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을 대신하여 속세인을 맞이하는 귀요미 돌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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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사 극락전은 동향이나, 산이 깊은 탓에 부처님 계신 자리까지 아침 해가 미처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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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앞 살포시 합장하고, 염불 중인 스님께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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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못보고 내려간 공산폭포를 향해 수도사를 나서 5분도 채 못가 만난 풍경. 이제 막 기지개를 편 숲을 엎은 나무의 분위기에 마음이 움직여 찍었으나 사진으로는 당시 느낌의 반의 반도 안 담겨있어 실망스러웠다. 사실 못 담았다는게 옳은 표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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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케킹이라는 별칭의 summicron 35mm 4세대와 일포드 hp5 필름의 궁합. 착란원이 어지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우개로 지우듯 뭉개지지도 않은 적당한 밸런스감이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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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랫쪽 메마른 저수지와 달리 상류는 계곡 체면치레할 만큼의 물은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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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과 세월이 빚은 곡선은 언제보아도 아름답고 오래보아도 쉬 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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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폭포, 팔공산 10경이라기엔 안쓰러운 수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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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포를 조망할 수 있는 관람대인 ‘망폭대’ 옆 돌탑. 망폭대를 거꾸로 읽으면 대폭망..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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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시를 넘기자 치산 저수지 아래 매점에도 볕이 든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더운 날이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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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aken with leica m6, ilford hp5 plus and summicron 35mm f/2 4th generation 

 

금척

야간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은 같은 처지의 고등학생들로 노상 붐볐다. 요행히 내가 이용하는 정류장은 상류(?) 쪽이라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는데, 주로 맨 뒷자리 창가 자리를 선호했다. 경주를 벗어나 시외국도를 달릴 때 버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청량한 밤공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밤 늦은 버스는 정류장을 하루 종일 학교에서 시달려 저항할 기운도 없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집어삼킨다. 그렇게 게걸스런 입석버스는 시내를 벗어날 즈음 소화불량에 걸릴 듯 과식하기 십상이다.

지정석에 앉으면 같은 정류장에서 친구와 버스에 올라 집까지 서서 가는 여학생이 있었다. 작지만 하얀 피부에 검은 단발머리가 무척 잘 어울리는 귀여운 친구였다. 어느때부터인가 나는 창가 풍경보다 그 친구를 바라보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은 금척이었다. 숫기 없던 나였지만 그 친구에게 말 한마디 못 건네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순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었던 것인지 하루는 그 친구와 함께 한번도 내려본 적 없는 금척리 정류장에 대책없이 내려버렸다. 비가역적 상황에 몰려버린 이상 나는 드문드문 가로등에 의지해 집으로 가는 그녀를 십 미터 가량 거리를 두고 조심스레 뒤따를 뿐이었다. 가슴은 쿵쾅거리며 두방망이질 쳤다.

‘뭐라 말 걸지?’

‘무서워하진 않을까?’

‘용기내서 말했는데 거절하면 어쩌지?’

이 생각 저 생각에 머리가 점점 복잡해진다. 나를 의식한 건지 그 아이의 발걸음이 약간 빨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긴장되는 내 맘도 모르고 저 멀리 약간의 메아리를 업은 개 짖는 소리는 늦은 밤 적막한 시골길에 음산함을 덧입혔다.

아까 정류장에서 내려 이 낯선 동네를 얼마나 걸은 걸까? 그 친구 집은 제법 동네 깊숙이 위치한 듯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들어왔다면 이제 곧 집에 도착할 것이다. 목적한 바 실행을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은 걸 직감했다. 그러던 찰나에 나는 그만 철문이 ‘철컹’하고 열리는 소릴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철문 닫히는 소리는 혼자만의 로맨스가 이것으로 종쳤음을 명료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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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피요님이 메신저를 통해 사진 몇 장을 보여주었다. 금척리 고분군을 제주오름 마냥 맛깔나게 찍은 사진이었다. 금척, 참 오랜만이다. 그새 20년인가? 문득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일었다. 한여름 밤의 꿈 같은 기억 때문일까? 그 곳을 다시 걷고 싶어졌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노동절 쉬는 날 부모님 댁에서 하루 자게 되었는데, 촌집이 금척에서 불과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이다. 실제 거리는 사실 지도를 보고나서야 알게되었는데 생각보다 가까워 놀랐다. 네비로 최단거리를 검색해보니 농로로 안내를 한다. 보통 차로 갈 때는 가지 않는 길이라 다음 날을 위해 코스를 숙지해두었다.

해가 제법 길어진 오월의 아침, 생전 처음 걷는 농로를 따라 금척으로 향했다. 바지런한 촌로는 식전부터 밭을 살피고 젊은 청보리는 바람에 넘실거린다. 당연하게 익숙한 줄 알았던 풍경이 생경하게 다가왔고 나는 꾸준히 셔터를 눌렀다.

집을 나선지30분만에 금척리 고분군에 도착했다. 울타리가 쳐져 있어 잠시 당황하기도 했으나 조금 돌아가니 고분군 안으로 쉬이 들어설 수 있었다. 들풀이 무성하지 않아 걷는데 큰 불편은 없었다.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천년을 웅크린 소박한 고분들을 프레임에 채우면서도 저 너머 자비로운 와불의 허리같은 산등성이를 소외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시나브로 해가 꽤 높이 올랐다. 잰 걸음으로 다녀도 늘 촬영 시간은 부족하다.

여기 서 있으니 경주로 통학하며 보았던 금척리 그리고 고분군 풍경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변한 것은 오직 나 하나 뿐인 것 같다. 짧은 그 하루의 기억으로 금척리에 들어설 때 뭔가 설레이거나 감상적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에 들려진 카메라로 현재를 더욱 치열하게 기록하는 것 뿐이었다. 마치 나 또한 시간을 초월해 필름에 박제될 수 있는 것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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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photographed by leica m6 & ilford hp5 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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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충남도청 – 대전

 

근대 문화 유산에 대한 개인적 흥미로 인해 오랜 모습을 간직한 곳을 방문하기를 즐긴다. 물론 우리에게 ‘근대’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무척 혼란스럽다. 새로운 기술과 가치관이 쏟아지던 ‘모던’의 향수와는 거리가 멀었던 시대상 탓에 근대 문화 유산을 사진에 담는 작업은 그래서 또 곤혹스럽고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아직 정리할만한 사진도, 자료도 또 그럴만큼 많은 작업을 하지도 못했지만 B급 사진 멤버들의 릴레이를 기대하며 지난 출장 길에 들렀던 대전의 옛 충남도청 사진들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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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15 LeicaIIIa Canont28mm HP5 10-1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에 위치한 옛 충남도청 건물. 1932년에 지어져 2012년까지 도청으로서 역할을 하였고 내포 신도시로 도청이 이전한 이후 현재는 대전 근현대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초에는 2층으로 건설되었으나 해방 후 3층을 추가로 얹었다. 당당하게 자리잡은 건물은 현재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과 일직선으로 이어져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에 들어선 일제의 통치시설 답게 권위적이고 위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런 이 건물에서 권위를 느껴야하는 것 또한 우리 근대사의 아픔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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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15 LeicaIIIa Canont28mm HP5 11-1

1층 복도의 모습. 샹들리에 조명 위와 바닥에 별 문양이 보인다. 이 별 문양은 건물 벽면을 비롯한 곳곳에 장식되어 있는데 조선총독부에 있는 그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한 때 논란이 되었다고 하는데 ‘큰 의미’는 없는 것으로 밝혀져 지금껏 남아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진짜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는 쪽국애들한테 물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굳이 추론해보자면 교통의 중심지 대전이니 나침반의 방위각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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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15 LeicaIIIa Canont28mm HP5 18-1

건물외벽에도 이처럼 별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사실 이런 문양은 우리에겐 그 개념이 없던 것으로 대한제국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이화(배꽃)문양도 사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거기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들이 많다. 사실상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해진 일본이 자신들의 지방 정부와 같은 정도로 격하하기 위해 문양 사용을 강요했다는 얘기부터 그렇지 않은 자주권의 발현이었다는 얘기까지 있지만 뭐가 맞든지 간에 힘없는 나라의 슬픈 역사는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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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15 LeicaIIIa Canont28mm HP5 13-1

80년이 넘은 건물이니만치 그동안 창틀 정도는 교체되었을 만도 한데 여전히 원형 그대로인 것으로 보였다. 오래 되었어도 튼튼하게 남아있는 교량이나 건물들을 보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하시던 얘기가 떠올랐다. ‘일본놈들이 말이야. 뭐니뭐니 해도 저런거 만들어 놓은거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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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15 LeicaIIIa Canont28mm HP5 12-1

2층으로 올라가보기로 한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은 반들거렸고 넓은 채광창은 별다른 장식조차 없이 단조로워 사무공간다운 딱딱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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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15 LeicaIIIa Canont28mm HP5 17-1

계단을 오르다 뒤돌아서 입구로 누군가 들어오길 기다려봤지만 한참을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던 차에 그나마 한 분이 나타나셔서 셔터를 눌렀다.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온지라 전시관 문도 열리지 않았고 찾는 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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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15 LeicaIIIa Canont28mm HP5 14-1

사람이 너무 없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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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 오르면 한 가운데 도지사 집무실이 있다. 개방되어 실내를 구경할 수 있지만 역시 너무 이른 시간이 문이 닫혀 있었다. 결국 도지사 집무실을 등지고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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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바로 옆에는 충남지방경찰청 옛 건물이 남아있다. 이 건물은 해방 후의 건물이지만 일제 당시에도 도청 바로 옆에 경찰서 건물이 자리하여 행정과 치안의 핵심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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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15 LeicaIIIa Canont28mm HP5 19-1

그리고 그 옆에는 다소 특이한 형태의 상무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곳은 일제 당시 일본 경찰들이 유도 등 무예를 수련하고 신체를 단련하던 ‘무덕전’이라는 일본식 건물이 있던 자리로 해방 후 원래 건물은 소실되고 1963년에 그 기초를 이용해 다시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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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있던 무덕전.  1967년에 철거되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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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처럼 각 지방 경찰서에 무덕전이라는 건물을 지어 경찰들이 유도를 수련하게 했는데 軍도 아닌 경찰에서 ‘武’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한 것만 봐도 그들의 통치, 치안 철학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아무 생각이 없다보니 해방 후에 새로 지어진 이 건물의 이름도 ‘상무관’이다. 일제가 남긴 것은 소나무의 상채기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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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시간에 오는 바람에 전시관을 보지 못해 얻을 수 있었던 정보와 자료를 접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언젠가 다시 방문할 일이 있기를 기대하며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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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5. 대전

Leica IIIa / Canon 28mm f2.8 LTM / Ilford HP5+ 400 / I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