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 없이 걷기 in 뉴욕

처음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났던 이십 대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의 기술은 ‘정처 없이 걷기’이다.

한 지점에서 시작해 대략의 큰 방향성을 정한 후에 이 길, 저 길,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며 걷는 것. 어떨 땐 원하는 곳에 닿을 수도, 또 때로는 전혀 의도치 않았던 곳에 도착할 수도 있는, 특별한 목적을 갖지 않는 발걸음의 궤적 만들기.

몇 년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떠난 여행이 드물었기에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곳 뉴욕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일상의 루틴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매일의 일상 중 아주 잠시라도 짬을 내어 산책을 나간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어디가 어디인지 맹했지만, 몇 번 다녀보니 이제 이곳의 거리가 어느 정도 눈에 익는다. 기본적으로 대략의 남북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Avenue와 Street의 단순한 블록 구조라서 공원, 터널 등등에 막혀 길이 사라지는 일부 변주를 제외하면 뉴욕 지리는 익히기 어려운 편이 아니다.

산책이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시간은 아침 아홉 시부터 정오 사이이다. 시간을 고려할 때 대부분의 산책은 역광을 피하기 위해 남에서 북, 또는 동에서 서로 길을 따라 걷는다.

7번가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다 보면 타임스 스퀘어를 지나 센트럴파크의 끝자락에 도달한다. 콜럼버스 서클을 지나 링컨 센터와 자연사 박물관을 지나쳐 센트럴파크의 서쪽 윗자락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재클렌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를 만난다. 공원의 반대쪽 동편 자락 5번가는 Museum Mile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뿐만 아니라 구겐하임, 노이에, 메트로폴리탄 분관 등 여러 미술관,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유명한 돌진하는 황소상에서 시작하는 브로드웨이는  직선으로 올라오던 길이 유니온 스퀘어를 지나며 혼자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다. 그렇게 꺾여나간 길은 차례로 5번가, 6번가, 7번가를 교차해 가면서 맨해튼 끝자락의 메트로폴리탄 클로이스터스 분관을 지나 도시를 빠져나간다.

없는 줄만 알았던, 숨어있는 4번가, 1번가보다 동쪽에 이스트강을 마주하며 있는 Alphabet Avenues. 우연히 마주치는 길의 변주들은 산책에서 만나는 소소한 기쁨들 중 하나다.

처음 왔을 땐 이곳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많이 찍지는 못했어도 지난 몇 달 간을 정리하다 보니 대략의 감이 잡히는 것도 같다. 내가 좋아하고 즐겨 담는 풍경의 느낌은 이곳이라고 서울과 크게 다를 리 없다.

일 년 계획의 맨해튼 살이 중 벌써 넉 달이 지났다. 남은 시간은 아마도 지금까지 보다 더 빨리 지나갈 것이다. 그 시간이 헛되이 지나가지 않도록 조금 더 많이 보고, 느끼고, 담아야겠다. 언젠가 뒤돌아보면 분명히 그리워질 시간일 테니까…

NYC.

Sep.-Dec. 2017.

All photographed by X-Pro2 + Color Skopar 21mm.

DSCF9839
Merry-go-round / Coney Island
DSCF9865
Sunglasses / High Line
DSCF0012
Spielberg / Near Times Square
DSCF0015
Morning / Wall St.
DSCF0401
Check / Near Union Square
DSCF0485
Faces / Brooklyn
DSCF0505
Bridge / Brookyln
DSCF0522
East & West / Broadway
DSCF0556
Metro / Manhattan
DSCF0606
Victoria’s Secret / 6th Ave.
DSCF0613
Taxi / 7th Ave.
DSCF0620
Bus stop / 5th Ave.
DSCF0621
Pedestrian / 5th Ave.
DSCF0630
Flag / Grand Central Terminal
DSCF9228
Flat Iron / Broadway
DSCF9232
Pizza / 7th Ave.
DSCF9265
The Sackler Wing / The Met
DSCF9280
Snow / E 20th St.
DSCF9290
Empire State Building / Lexington Ave.
DSCF9302
Main concourse / Grand Central Terminal
DSCF9319
Crosswalk / 5th Ave.
광고

붉은실로 꿰어낸 프라하

2017-12-14 14;56;11
‘세상 모든 사람은 붉은실로 연결되어있다’는 중국속담을
사진을 본 블로그이웃이 전해주었다.

 

프라하에서 보낸 일주일간 만난 수백장의 사진 중 13컷을

13장면,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이지만

붉은 실로 꿰어 가슴 속에 담는다.

 

체코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붉은 장미라고 한다.

프라하에서 만난 붉은색은

낯설고 춥고 흐린 프라하 날씨에서

그 붉음이 호기심, 기쁨, 그리고 위로, 아쉬움이  되었던 것 같다.

 

 

 

 

 

 

 

 

 

 

 

 

 

 

 

 

 

 

 

 

 

 

GR000090

 

@ 구시가의 첫번째 숙소 웰컴아파트먼트프라하.

프라하에서의 첫날 아침. 첫사진… 첫인상은 이랬다. 한국에서는 모텔에서나 어울릴듯한 붉은 침구가 프라하의 첫날아침을 붉게 물들여줬다.

 

 

 

 

 

 

 

 

 

 

 

 

 

 

 

 

 

GR000131

 

@스트라호프수도원.

먼 타국에 오니 레스토랑의 냅킨색깔에도 시선이 갔다. 프라하 식당에선 냅킨색깔이 다양했다. 한국처럼 무색의 통일된 냅킨이 아니라 상당히 컬러풀했다.

 

 

 

 

 

 

 

 

 

 

 

 

 

 

 

GR000191

 

@ 알퐁스 무하 미술관.

혼자 여행하시는 할머니.. 그녀의 패션감각과 카메라에 그 유명한 미술관보다 눈이 갔다.

GR000203
 @ 구시가산책
추위, 낯선 음식, 카메라 도난까지… 힘든 여행의 시작이었지만 시내 걷기와 촬영이 힘이 되어줬다.  우연히 촬영한 이 한컷은 심한 노출과다가 되어버려 거리사진에서 적절히 노출촬영을 못하는 구나하고 다시 한번 숙제를 안겨줬다.
GR000295 (1)

 

@ 비셰흐라드성 후문.

우연히 방문한 골목 카페에는 강렬한 색채의 그림이 벽면 가득히 걸려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체코 부부 중 남편분을 함께 프레이밍했다.  남편의 등뒤를 바라보는 붉은 드레스의 여인… 내겐 재밌는 프레이밍과 이야기가 담긴 순간이다.

 

 

 

GR000453
@ 시외곽 비오던날 9번트램과의 만남.
버스 잘못타고 시외곽으로 갔다가 스마트폰이 인터넷이 되지 않아 난감한데 마침 폭우까지 쏟아졌다.  겨우 만난 숙소까지 연결되는 빨간 9번트램과 아주머니의 가죽점퍼가 어찌나 따뜻하고 반가웠던지…

GR000549

 

@ 프라하3지구.

프라하역에서 3지구의 숙소 타보르까지 걸어오던날 . 관광지를 벗어나 프라하시민의 거리를 걷다가 아쉽게도 사진기를 많이 들지 못하다가 숙소 거의 다와서 만남의 기쁨을 느꼈다.

 

 

GR000582
@ 비셰흐라드성 가는길
낯선 곳에 오니 청소부의 옷색깔도 큰 변화로 느껴진다. 붉은색 작업복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프라하에서 청소부도 포토제닉하다.
GR000659
@ 프라하13지구.
체코포토센터를 방문하기 위해 그 마음먹고 시 외곽으로 나갔는데 마침 전시는 이미 끝난 상태였고, 할 수없이 주변을 산책하다가 좋은 인연과 멋진 풍경도 만난 행운의 날로 기억된다.  다시봐도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아쉬움이 느껴지는데 그게 나의 심리적 거리이기도하다.
GR000676
@  말라스트라나  스타벅스앞
아름다운 중년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빨간 머플러가 참으로 잘 어울렸다.
GR000682
@ 비셰흐라드근처.
학회장으로 가려고 트램역에서 기다리던 중 청년의 붉은 안경테를 보고 본능적으로 트램을 기다렸다. 마침 운좋게도 청년이 떠나기전에 트램이 도착했다.
GR000702
@ 떠나는날. 바츨라프 하벨 공항
 평생 터번을 본 적은 티비나 영화 속에서 뿐이고 게다가 붉은 색 터번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지막 프라하 풍경이었다.

 

홍콩_스냅

HK_B_01

HK_B_02

HK_B_03

HK_B_04

HK_B_05

HK_B_06

HK_B_07

HK_B_08

HK_B_09

HK_B_10

HK_B_11

HK_B_12

HK_B_13

HK_B_14

HK_B_15

HK_B_16

HK_B_17

HK_B_18

HK_B_19

HK_B_20

HK_B_21

HK_B_22

HK_B_23

HK_B_24

HK_B_25

HK_B_26

HK_B_27

HK_B_28

HK_B_29

HK_B_30

HK_B_31

HK_B_32

HK_B_33

HK_B_34

HK_B_35

HK_B_36

HK_B_37

HK_B_38

HK_B_39

HK_B_40

HK_B_41

HK_B_42

HK_B_43

HK_B_44

HK_B_45

HK_B_46

HK_B_47

Leica MP / summicron 35mm asph / HP5+ D76 self_dev. / epson4870

Hong Kong_snap
2017. 10. 03. ~ 06.

지난 연휴때 홍콩에 다녀왔습니다.
다들 그렇듯이 꼬맹이 위주 가족여행이여서…

첫 날은 기차덕후 아들 원풀어주느라 트램타고 종점까지 가서 되돌아오느라 하루 다 보내고,
둘째 날은 홍콩과학관이랑 홍콩역사박물관에서 체험하느라 꼬박 하루 다보내고,
세째 날은 홍콩디즈니랜드 오픈시간에 들어가 문닫을 때까지 놀다 나왔구요.
마지막 날은 피크트램 탈려고 줄서다가 하루 다 보내고 밤에는 이유없이 스타페리만 몇번을 왕복했는지…

그 바쁜 와중에 잠시 잠깐씩 담은 홍콩스냅입니다.
담에 정말 자유의 몸으로 B급분들이랑 카메라 맘 편하게 메고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2009년 12월, 송도

사실 창고가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은 ‘서재’라고 부르고 싶은 내 방 책꽂이 한 켠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안에는 수백롤의 필름이 차곡차곡 담겨져 있는데 여기저기 널려있는 필름들을 보다 못한 와이프가 넣어준 것들이다. 내 저것들을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텐데 하며 가끔 노려보기도 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 만다.

‘에이, 나중에 하자.’

그러다 지난 금요일밤 괜히 한번 상자를 열어봤다. 마구잡이로 섞인 필름들을 천장의 형광등에 비추어보며 간만에 추억에 젖다가 송도 해수욕장을 촬영한 필름 하나를 발견했다. 36컷을 모두 살펴봐도 그 필름에서 기억나는 이미지는 단 한 컷도 없었다. 메모조차 해두지 않아 언제 찍은 건지도 알 수 없는 필름 속 이미지들은 전혀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빠듯한 용돈 사정으로 인해 인화지 한 장이 아쉬웠다. 그래서 굳이 ‘불필요한’ 밀착 인화는 생략했고 확대 인화 역시 한 롤에서 고르고 고른 몇 컷 외에는 하지 않았다. 이 버릇은 나중에도 그대로 이어져 스캔할 때도 한 롤 전체를 긁지 않고 네가티브를 비추어 보고 괜찮다 싶은 몇 컷만 추려 스캔을 해왔기에 네가티브를 보다가 새롭게 눈에 띄는 컷이 있는 경우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한 롤에서 한 컷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아도 이 건 단 한 컷도 스캔하지 않은채 쳐박힌 필름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도대체 이 필름은 왜 버림받았을까? 일단 한롤을 채로 긁어보기로 했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04-1.jpg

송도의 뒷골목 입구에서 부터 내 발걸음은 시작되고 있었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08-1.jpg

모래사장의 유실로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송도 해변의 회생을 포기하고 해안 도로가 건설되던 때의 막바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산책로는 거의 다 되었고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던 시점이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09-1.jpg

지금 평화의 여신상이 있는 광장 해안 축대 옆의 테트라포드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12-1.jpg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산책로에는 아직 모래가 많이 남아 있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아이들이 두꺼운 차림에 장갑까지 끼고 있는 걸 보니 제법 추운 날이었나보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13-1.jpg

우리의 기억은 이미지와 글에 얼마나 의존적인가. 21미리로 강아지를 이렇게 가까이서 찍었을 정도면 기억이 날 법도 한데, 현상 후 스캔조차 하지 않았던 탓에 이날 촬영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27-1.jpg

송도 해변 일주도로 건설을 맡았던 청구 건설의 현장 사무소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14-1.jpg

송도 해변 방파제 위에는 허름하고 어설픈 포장마차촌이 있었다. 송도 해수욕장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이 곳도 사라졌다. 당연히 무허가 불법이었을테고 태풍이라도 오는 날엔 위험하기 그지 없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아쉽기도 하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16-1.jpg

동남아의 수상가옥 마냥 방파제 한 귀퉁에 의지하여 바다 위에 자리 잡았던 포장마차들. 자리에 앉으면 판자로 만든 바닥과 천막 틈 사이로 파도가 출렁였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들으며 회 한 접시에 소주를 마시고 모래사장에 세워둔 차에서 눈을 붙히고 아침에 바로 출근했던 날도 있었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18-1.jpg

천막을 뒤집어 씌웠던 철골과 계단의 녹물이 방파제 바닥 곳곳을 붉게 물들였던 것이 기억난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20-1.jpg

배에서 내린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는 손길들. 포장마차가 사라진 지금, 더이상 배들은 이 곳에 접안하지 않는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22-1.jpg

방파제 왼쪽의 풍경. 송도 해변과 포항 구항이 멀리 보인다. 늘상 보는 장면이라 새롭지 않지만 이곳이 동해안에 몇 없는 지형인 영일만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19-1.jpg

다소 과다현상이 되어 콘트라스트가 강한 네가티브가 되었다. 암부가 많이 죽었음이 느껴진다만 평소 사진의 톤에 비해 칼칼한 것이 또 나쁘지 않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24-1.jpg

방파제에서 굿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인가, 요즘은 송도에서 굿하는 장면을 거의 보지 못했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30-1.jpg

변해버린 방파제 위 풍경과 달리 송도의 퇴락한 뒷골목은 이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골목 사이를 누비면서 정적인 사진에 동감을 불어 넣고자 누군가 지나가기를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래본들 무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사진이 되겠나 싶다. 부질없다.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33-1.jpg

앙상한 나뭇가지가 낡은 하얀 벽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흑백인데도 차갑고 투명한 겨울 공기가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려오는 걸 보니 늙은 듯 ㄷㄷ

 

 

 

091226 ContaxIIa Biogon21mm 400TX 06-1.jpg

이 사진 덕분에 이 필름이 언제 찍은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8년전의 블로그 포스팅에는 Nikon D700으로 같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이 날 찍은 파일은 모두 지워 버렸다는 내용이 있었다. 찍은 사진도 맘에 안들고 앞으로 어떤 사진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유와 함께. 아마 그래서 이 날 찍은 필름도 스캔조차 하지 않고 던져뒀던 듯 싶다.

 

 

8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날 느꼈던 회의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뭘 찍어야 하고 뭘 표현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찍어야 하는가. 아니 그런 것에 답은 있는가. 답을 찾을 필요는 또 있는 것인가. 여전히 머리 속은 복잡하지만 이렇게 출토된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사진들이라도 시간의 무게가 더해지니 기록으로라도 가치가 있겠다 싶으니 그건 또 다행이라 해야하나. 아직도 모르겠다.

 

 

2009.12.26. 포항 송도

Contax IIa / Carl Zeiss Biogon 21mm f4.5 / Kodak 400TX / IVED

필름, 라이카 그리고 일년

필름 시작한지 어느새 1년이 지난 것을 깨닫고는 새삼 놀랐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올라오는 걸 보니 디지털에서 필름으로 넘어 온 일년이 꽤나 즐겁긴 했나보다. 이미 필름 입문 100일 기념으로 한 차례 우려먹었던 터라 올챙이적 썼던 초반의 글은 생략하기로 한다.

  § 궁금하면 클릭 → “필름 그리고 라이카

일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겠지만, 사실 필름을 쓰기 전 내 사진생활은 어느덧 기억 속에서 너무나 멀어져 버렸다. 솔직히 흑백 필름에 이렇게까지 빠져들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주변의 지인들은 이런 나를 보고 적응하고 말 것도 없이 금방 필름에 익숙해졌다며 놀라워했지만 실은 시행착오와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오리발은 물 아래에서 조낸 저어대고 있었던 것..

그 와중에 사진만 찍으려는 나를 가만두지 않는 짓궂은 지인들은 끊임없는 뽐뿌와 감언이설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곤 했지만 내심 그 조차도 나쁘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선택과 집중으로 최소한의 것만 받아들이며 어느새 나도 8매가 뭔지 알게 되고 콘탁스가 어쩌네 자이즈가 어쩌네 귀에 담은 풍월이 제법 늘어갔다.

때로는 선문답 같기도 하고 때로는 저 무슨 한심한 시간낭비인가 싶기도 했던 환자들의 농담따먹기도 어느새 익숙해지자 한없이 가볍고 쓸데없어 보였던 그들의 ‘놀이’도 필름 사진과 올드카메라를 사랑하는 동호인 그룹만의 유니크 한 재미임을 알게 되었다. ‘놀이’라는 필터를 적용해보았더니 적어도 내 주변에 자칭 환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치고 진짜 환자들은 없었다. 장비질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사진에 대한 고민과 열정을 쏟았던 있는 이들이라는 걸  그들과 가까워 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영원히 쓸 것 같았던 렌즈를 바꿨다. 10년은.. 아니 평생 써야지 했던 헥사논은 1년도 되지 않아 집을 나가 주미크론으로 돌아왔다. 내년에도 주미크론이 내 곁에 있을지 장담할 순 없으나 어찌하랴?

Que Sera, Sera

 

 

Daegu

몇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 대구에서 살았다. 다른 곳으로 간다는 생각조차 해 본적 없다. 그러니까 오리지널 대구사람인 셈이다. 여기서 태어나고 살고 늙어가면서 난 왜 이방인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일까 생각했다. 오른쪽도 왼쪽도 아니지만 다수의 편에서 보면 분명 그들보다는 왼쪽이었을 것이다. 극단의 차별과 불균형이 이 도시를 관통하지만 또 ‘우리가 남이가!’ 정서가 기저에서 두툼하다는 것도 부정되지 않는다. 도도하지만 천박하고 부유하지만 가난하고 따뜻하지만 세한岁寒이 관통하는 카오스의 땅! 언제부턴가 나는 이곳을 고담시라고 부른다.

틈틈이 기록한 고담시 일상을 기회가 닿는대로 지면을 통해 공유하려 한다. 발길 가는대로 담은 것이다. 애증이 교차된 모순 가득한 고향의 기록이다.

 

2017. 2 / Daegu
TC-1
Leica MP + Summicron 50mm 4th
HP5+

발로찍은부산

청접장이 도착했다. 어릴적 고무신 신고 개울서 같이 뛰놀던 녀석의 늦은 결혼이다. 식은 주말에 멀지않은 부산! 대충 축의금만 보내고 말일은 아니기에 아내에게 하루 갔다와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아내는 이왕 내려가는거 부산 한바퀴 돌아보고 사진도 찍고 그리 하란다. 우왕 성은이가 무지망극이다.

아내의 승인도 떨어졌겠다 본격적으로 지인찬스와 인터넷 검색 등으로 부산에 가볼만한 곳 몇 군데를 후보로 올리고, 도보여행인 점을 감안하여 이동거리가 짧은 코스로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자갈치시장 – 보수동(책방골목) – 국제시장”

죽도시장에 대한 애착이 다른 도시의 어판장으로도 이어지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자갈치는 꼭 가고 싶었다. 최대한 일찍 가서 운이 좋으면 경매현장도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부산여행 관련 블로그에서 이미 익숙해져버린 보수동 책방골목과 군것질로 허기도 채울 겸 먹자골목이 유명한 국제시장을 코스에 끼워넣었다. 대충 장소도 정해진 만큼 이젠 장비를 고민할 차례였으나, 한창 필름찍는 재미에 빠져있는 나에겐 필름바디에 35미리 초점거리의 렌즈 하나 그리고 일포드 HP5+ 흑백필름 서너롤이면 차고넘쳤다.

이렇게 저렇게 친구의 결혼식 날이 밝았고, 이른 아침 터미널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노포동에 떨어진 후 다시 지하철을 타고 남포역에 당도했다. 구멍을 빠져나오니 하늘에 구름이 빼곡하다. 야외에서 수동카메라 쓰기엔 참 좋은 날씨다. 카메라 셔터속도 다이얼과 렌즈의 조리개링을 적당한 값에 세팅하고 영도다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busan-1
leica m6, ilford hp5

스무걸음 남짓 걸었나? 약재상을 하시는 할머니와 강아지를 만났다. 잠시 물건가지러 가시는 할머니와 놀아달라고 조르는 강아지의 실랑이를 첫 컷에 담았다. 뭔가 재밌는 순간을 잡아낸 듯 했으나 필름카메라기에 당장 확인할 길이 없다. 디지털이었으면 재생버튼 눌러 그 자리에서 확인했겠건만.. 스냅 결과물에 대한 궁금증이 잠시 일었으나 어찌할 도리 없이 영도다리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

.

.

busan-2
leica m6, ilford hp5

영도대교를 건너지 않고, 반세기 전 점집들이 성황을 이루던 다리 옆 좁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익숙한 바다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한다.

.

.

.

busan-3
leica m6, ilford hp5

평일 같았으면 분주했을 어판장 옆 해산물 창고도 한가한 일요일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잉? 잠깐만..혹시 어판장도 한가한가? 아니나 다를까 서둘러 도착한 자갈치 어판장은 고요했다. 아뿔싸! 내심 기대했던 경매풍경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하릴없이 노점 몇 개를 지나 탁 트인 바다로 나갔다.

.

.

.

busan-4
leica m6, ilford hp5

음.. 과연 부산하면 갈매기 갈매기 하면 부산이로구나. 포항보다 백배 많다.

.

.

.

busan-5
leica m6, ilford hp5

바다를 품은 사내는 버거운 일상의 의연함을 잠시 내려놓고 센티멘탈해진다..

.

.

.

busan-6
leica m6, ilford hp5

.

busan-7
leica m6, ilford hp5

.

busan-8
leica m6, ilford hp5

자갈치 주변을 돌며 게으른 시장의 일요일 풍경을 필름 몇 컷에 구겨넣은 후 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busan-9
leica m6, ilford hp5

텍스트는 강력하다. 이미지와 형태 따위보다 수만배 힘이 있다. 우리 안구는 자동인식기능이 탑재된 양 흘러넘치는 텍스트들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조목조목 색인한다. 그리고 나와 1이라도 관계된 것들은 연결점을 생성하여 붙잡아두는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

.

.

busan-10
leica m6, ilford hp5

걸어서 도착한 광복동 젊음의 거리는 간밤의 술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고약한 풍경이었다. 젊은이들의 이런 모습에 혀를 차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나도 이제 40줄 어엿한 아재임을 셀프로 인식했다.

.

.

.

busan-12
leica m6, ilford hp5

.

busan-13
leica m6, ilford hp5

.

busan-14
leica m6, ilford hp5

여기는 보수동 책방골목. 흘러가며 몇 컷 찍고 금세 빠져나왔다.

.

.

.

busan-15
leica m6, ilford hp5

1분 간격으로 재밌는 순간을 발견했던 삼거리

.

.

.

busan-16
leica m6, ilford hp5

별 흥미 없었던 보수동 책골목에서 보다 외려 여기서만 족히 20분 가량 머물렀던 것 같다.

.

.

.

busan-17
leica m6, ilford hp5

삼거리 코너를 돌아 가파른 언덕을 지긋이 밟으며 올랐다. 숨이 가빠질 무렵 용두산공원 부산타워를 품은 옛 부산의 아기자기한 풍광을 만났다. 그래 바로 이게 부산이지.

.

.

.

busan-18
leica m6, ilford hp5

언덕을 내려와 국제시장 먹자골목으로 들어선다. 이른 아침부터 버스에 지하철 그리고 바지런히 걸었던 탓에 꽤나 허기가 진다. 뜨끈한 오뎅국물도 좋고, 내 평생 페이보릿 떡볶이도 무지 맛나 보인다.

.

.

.

busan-19
leica m6, ilford hp5

이리저리 재지않고 적당한 식당을 골라 곧장 들어갔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음식 나올때가지 가게 안을 살폈는데,  개업할 때 시집와 가게의 역사를 묵묵하게 목도하고 있는 벽시계와 오래된 등유난로 그리고 좁은 가게 안에서 긴 시간동안 최적화된 테이블과 조리도구들의 배치까지.. 모든 것에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다.

.

.

.

busan-20
leica m6, ilford hp5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이제 친구의 결혼식장으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다. 이곳에 도착했던 남포역으로 되돌아가는 길에서 우연히 용두산공원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손목시계는 시간이 빠듯하다고 아우성이었으나 언제 또 이곳에 오겠나 싶어 다녀와보기로 했다. 용두산은 실제 해발 49m로 높지 않은데다 광복동 방향에서 손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부담은 훨씬 덜했다.

.

.

.

busan-21
leica m6, ilford hp5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는 도중 용두산 어깨치에 마련된 야외 체육시설이 흥미롭다. 어르신들 모두 기구 하나씩 맡아서 각자의 운동에 열중하고 계신다. 20년 뒤 나는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사진은 계속 찍고 있는걸까?

.

.

.

busan-22
leica m6, ilford hp5

용두산공원을 마지막으로 지하철에 올랐다. 오전 내내 부지런히 걸었던 탓에 딱딱한 철제의자임에도 꽤나 아늑하다. 노곤함을 친구삼아 목적지까지 꾸벅꾸벅했다.

.

.

.

busan-23
leica m6, ilford hp5

친구야. 결혼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