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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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공장 옆 야산을 허물고 터를 닦았다. 나는 이 때 이 양반이 차 장사나 하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멍하이, 2015]

사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가 조탁한 세계를 말하는 것 보다 괴로운 일이다. 언어로 묘사해 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서로 다른 세계와의 만남 또는 충돌 같은 것이어서 프로토콜 맞추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표정, 채취, 숨소리, 목소리, 생김새, 어투, 습관 따위를 섞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은 고통에 가깝다. 다른 세계를 말한다는 것은 내 세계로 걸러낸 주관이다. 이해한다고 하지만 주관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어서 내 세계로 걸러지는 것 말고는 받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를 그로 이해한다는 것은 애시 당초 불능이다. 그는 반드시 나로 이해된다. 근원적 한계는 절망과 고통이다.

사내를 만나면서 시간의 두께만큼 사진이 모였다. 늘어놓고 보니 그가 조금 보인다. 글 몇 줄 붙여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말 하지마. 난 이제 한 살이여!” 세상 배우고 연습하는데 한 갑자 보냈단다. 이제 살아내기 시작한다는 사내. 용렬한 글로 무구한 어떤 것이 훼손되거나 멋대로 규정되지나 않을까 걱정 되지만 이 사내를 말하고 싶다. 그는 이 용렬한 글에 갇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

매섭거나 모질거나 거칠거나 소박하거나 무구한 것이 뭉치고 섞여서 만들어진 사내는 한잔 술에 늘어진 빤스 고무줄처럼 자유롭다. 결핍을 버무려 불쏘시개로 태워 쓴다.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에 변덕스럽지만 동의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한다. 즉흥적이지만 손발이 움직일 때를 알고 행동 해야 할 때 사리지 않는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에서 섬뜩한 안광을 뿜지만 슬픔과 고독과 외로움 따위를 담배연기에 짱박아 뱉을 줄 아는 낭만이 있다.

“야~피울아! 나 같은 천재는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구조여서 그게 그이야긴데 본론이 무엇이건 결말은 언제나 자기자랑으로 갈무리한다. ‘기승전자기자랑’ 이라고 별명을 지어 불렀는데 맘에 들어 한다. 이 별명은 내가 지어준 것이다. 굳이 생색내는 이유는 누가 지어 준 것인지 까마득하게 잊어먹기 때문이다. 매번 그렇다. 타고난 장사꾼이라고 말하지만 후천적 습득의 결과다. 천성은 공인이지 싶다. 천지를 후비고 다니다 차가 나는 산에 들어서 저 닮은 사람들과 섞여 놀았다. 그러다가 차 만들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차는 밥이 되었고 사내를 뜨겁게 태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 불러 모아서 놀고 싶다.
황제가 마시던 차를 만들어야지.
사람들에게 안전한 먹거리 주고 싶다.
그가 그린 풍광(그는 늘 ‘그림’이라고 말한다) 가운데 내가 아는 몇 가지다.

꿈의 성공은 꿈의 달성이 아니다. 내가 열 개의 풍광을 그렸을 때 그것을 전부 이루겠다는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 그린 풍광의 본질이 무엇인지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 대부분의 풍광이 아직 그림으로 있지만 … 달성되고 달성하고 달성 할 것에 관한 정렬이 아니라 풍광(꿈 또는 그림 어떤 것) 그 안에 삶의 중심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꿈’이라는 물건은 품는 순간 의미와 가치가 된다. 그래서 나는 꼼짝 없이 그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꿈은 … 꿈꾸는 자는 뜨겁다.

난 사내의 서사에는 관심 없다. 몇 살이고 고향이 어디고 따위의 과거 찌꺼기나 후비적거려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꿈’ 뜨거운 물건을 아직 품고 있는 사내. 그가 그려놓은 그림과 만들어질 풍광이 궁금할 뿐이다.

그는 ‘바람의 꿈’ 그것을 품고 산다.

그대도 가슴 뛰는 풍광 몇 개쯤 품고 있겠지!

2015년 멍하이 창대한 땅을 고르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차창(차를 만드는 제조회사)을 열었다. 이방인이 이룬 창업이다. 고수차(100년 이상 차나무에서 수확한 찻잎으로 만든 차) 바람이 불면서 힘을 축적할 수 있었다. 10 여년 축적한 힘으로 공장 옆 산을 허물고 거대한 터를 닦았다. 고향에서 친구를 청해 축제를 열었다. 이 사내가 그림을 그리고 실현하는 과정은 단순하다. 상상을 그림으로 옮기고 그것을 심을 땅을 닦는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형편이 조금이라도 돌아오면 그만큼 세운다. 맘에 안 들면 허물고 기다린다. 다시 때가 오면 또 쏟아 붓고…이곳은 그가 ‘바람의 제국’을 상상하고 그린 땅이다.

R0012654[고향에서 친구들이 왔다. 잔치를 벌이기 전에 고향방식으로 의식을 치뤘다. 뭉클한 감동이 일렁거렸다. @멍하이, 2015]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친구다. 그가 보냈을 시간을 생각했다. @멍하이, 2015]

 

2017년 쿤밍, 복합문화공간을 열다.
차 시장을 버리고 경제개발구 심장으로 본사를 옮겼다. 생뚱맞은 이곳으로 옮기는 것을 모두들 의아해했다고 한다. 차 사업하기엔 인프라가 모여 있는 차 시장이 적합하다는 것은 상식에 관한 것이다. 도박 같아 보이던 시도는 ‘복합문화공간’을 겸한 공간으로 탄생했다. 중국 전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 분야전문가 그리고 친구들을 초대했다. 축제는 3일 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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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방 차산에 초제소와 객잔을 만들겠다고 또 땅을 밀어 놓았다. 완전 신이나서 뭐라고 설명을 하는데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고 내려다 보이는 구름이 낮설기만 했다. 이무에서 노가를 통째 업어와서 덩그러니 세워놓았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하나다. @의방초제소터에서, 2017]

 

[축제를 열었다. 축제는 3일 동안 이어졌다. @쿤밍,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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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의방차산, 2017]

[사내들의 방황이란 것이 본디 거칠고 고단한 맛이 좀 있어야 제격인 것이다. @시솽반나, 2017]

2018년 ‘바람의 제국’ 건설 중
2015년 닦아 놓은 터에 지붕이 하나 둘 들어서고 있다. 벅찬 일이라고 했다. 공장건물이 들어서고 나면 이어서 객잔, 공연장, 전시장, 연구소 등이 차례로 들어설 것이다. 한 귀퉁이 뼈져달라고 했더니 아무 때나 와서 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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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한 과정을 조금이라도 지켜 본 사람이라면 이 풍광은 감격이다. 2015년 닦아 놓은 터에 지붕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다. 제국은 공사중. @멍하이, 2018]

[새벽까지 취했다. “이 돌대가리 같은…” “해봤어?…해 보고 말해…” “나 같은 천재는 말이야…” “그림을 그려…그리고 가…똑바로 가” “야이 멍청한 놈아!”. 자동 재생 중이다ㅠㅠ. @쿤밍, 2018]

[차산에 가면 표정이 바뀐다. 편하고 순하다. 돼지 쓸게 받아 들고 흐뭇하다거나 꼬봉 한놈 잡아 놓고 썰을 푼다거나 새로운 차밭은 획득한다거나 모두 즐거운 일이다. @멍하이, 2018]

R0073197[다시 그림을 그린다. @젠수이, 2018]

 

 

 

 

 

안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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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남쪽. 그곳은 피안이고 동경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불편한 이곳이 어째서 피안이고 동경인지 생각해 본적이 없지 않지만 하도 오래 되서 무슨 생각을 했고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잊어버렸다. 그땐 투하된 노력이 최소한 대등한 경제적 가치로 치환되어야 옳다고 믿었다. 투입은 줄이고 산출을 늘이려면 계획을 짜야 했고 가성비를 높이려면 그것은 더 치밀해야 했다. 바쁘게 움직였다. 계획에 맞춰 움직이고 먹고 볼거리를 찾아 다녔다.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면서 뿌듯했고 내일은 새벽같이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깃발 따라 찍고 찍고 다니는 사람들이 안타갑다고 생각했다. 난 그들보다 좀 다른 … 더 깊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지금 문득 생각났는데 윈난에 대한 로망은 ‘천룡팔부’로부터 시작되었지 싶다. 단씨성을 가진 바람둥이 녀석이 주유하면서 만나게 되는 기연과 사랑의 대서사시는 어른이에게 더 없는 재미였다. 북송과 요나라가 대치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서하, 토번, 대리국에 이르는 거대한 스케일을 담아낸 ‘천룡팔부’는 김용(필명)의 구라가 절정에 이른 시절 발표한 무협지다. 단예, 교봉, 허죽 3형제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사실적 느낌의 이야기는 저리가라. 선술과 요술이 낭자하게 펼쳐지고 기연을 얻어 얼떨결에 신공을 익히고 초절정 고수가 되는 일 따위는 식은 죽 먹기다. 절세미인을 만나 사랑이 싹트지만 알고 보니 배다른 남매라네. 두둥! 때문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의 원인제공자 되시는 단예의 아버지. 이야기 캐릭터 중에서 제일 부러운 이 양반은 대리국 15대 황제 단정순을 모티프로 만든 캐릭터 되시겠다. 젊은 시절 천하를 주유하러 갔다가 만나는 모든 미녀들과 인연을 맺게 되고 훗날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소설 막판에 갈등이 해결되고 자신의 여인들과 함께 스스로 최후를 맞는 의리의 카사노바 아저씨. 그 아버지에 그 아들(사실은 친아버지가 아닌 것으로 결론나지만) 단예란 놈도 마찬가지다. 부러운 놈.

그래서 … 아무튼 사랑과 모험이 넘치는 이곳은 상상속 샹그리라였다. 왕소저나 목꾸냥을 만나는 꿈을 꾸었다는 것조차 희미해질 무렵 이야기의 무대가 실제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름다운 풍광과 산과 강이 갈라놓은 작은 문명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존하는 그곳이 궁금했지만 아직은 로망일 뿐 닿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푸얼차와 다큐멘터리 ‘차마고도’가 아니었다면 운남은 아직까지 상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안오냐?”
“가야죠!”
“언제 올래?”
“마음은 거기 살아요.”
“후다닥 다녀갈 거면 오지마.”
“…”
“여긴 그러고 와서는 몰라. 적어도 한 달은 작정하고 와라.”

계획하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 말고는 정한 것이 없다. 눈뜨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먹고 어디라도 가게 되면 가겠지. 처음 며칠은 어슬렁거렸다. 눈뜨면서 찻물 올리고 있으면 화롯불을 바쳐들고 할아버지가 올라오신다. 차 마시다 할머니 차려 놓은 늦은 아침을 먹거나 집 앞 식당에서 미시엔(운남 쌀국수)이나 콩국물과 튀긴 빵을 먹었다. 차실에 가서 놀거나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해질녘엔 친구만나 한잔하고는 꽁꽁 얼어서 들어왔다. 어떤 날은 새벽까지 차곡차곡(차와 술을 번갈아 마시는 것) 뼈가 녹았으면 싶을 만큼 마시기도 하고 이마저 시큰둥해지면 츄리닝 바람으로 안마집가서 코를 골았다.

말하자면 이곳은 쿤밍에서도 신도시랄까! 경제개발구로 개발되고 있는 곳이다. 현대식 초고층 건물에 삐까번쩍한 세단부터 70년대나 있을 법한 풍광이 공존한다. 물론 옛 풍광들은 쾌속으로 지워지고 있다. 거리 노점 뒤로 황금빛 초고층 아파트가 보이고 하수도 시설도 마무리 하지 못한 너덜너덜한 길목에서 화이트칼라 삐끼들이 분양광고 짜라시를 돌리는 활화산 같은 이곳에서 동네아저씨마냥 어슬렁거리면서 눌러 놓은 기록 몇 장을 늘어놓고 보니 쌉쌀하던 공기가 코끝에 맴도는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이번 여행! 잘 하고 온 것 같다.

Kunming, Yunnan, China / 2017. 12

남는 건 사람 뿐

초상들!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답다. 사람이 전부다. 이번 여행에선 TC-1 덕분에 MP에 50mm를 물려 떠났다. 덕분에 초상사진이 다른 여행에 비해 많이 남았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이미지를 보는 순간 잊었던 이야기들이 다시 살아났고 금방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Leica MP + Summicron 50mm + 400TX
Ricoh GR

사족: 각 인물들과의 이야기를 썼다가 지웠다가 썼다가 지웠다.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지 망설이다 사족 같아서 결국 지우기로 했다. 그리고 아쉬워서 또 사족을 단다. 처음 인연이 다수지만 이미 십년이 넘은 인연도 있고 몇년 째 만나는 친구도 있다. 늘어 놓고 보니 남기지 못한 기록이 많다. 취재 설계 따위를 하지 않으니 계통이 있을리 없고 나중에 끼워 맞추자니 엉성하고 남루하다. 의미여서 찍은 것인지 찍어서 의미인 것인지 더더욱 모르겠다.

남은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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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떠난 화살 같다는 따위의 표현이 마뜩찮지만 허망한 시간을 표현할 마땅한 문장을 만들지 못하겠다. 여행을 다녀 온 지 반년이 흘렀다. 돌아오는 비행기에 앉자마자 심장이 팔닥 거리며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불편하고 불안한 기분은 어미품을 떠난 아이같다. 피안에서 멀어지는 듯 팍팍한 현실로 쾌속 돌진하는 비행기 소음이 몹시 거슬렸다.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으나 지난 시간들이 영사기를 돌려 놓은 듯 흘렀다. 3할 쯤은 투덜거리면서 보냈고 3할 쯤은 의무감으로 보냈으며 3할 쯤은 즐겁게 마시고 떠들며 보냈지 싶다. 잘난 척 하느라 1할 쯤 썼을 것이다. 작은 시비 때문에 심장이 새가슴처럼 촐싹거린다거나 여러 사람 빈정 상하게 한 일이 없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면구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람이 어렵지만 또 그렇다고 사람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탓에 매순간 성찰할 수 있길 바랄뿐이다.

돌아와서 제법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운남에서 하얀 밤토록 나눈 여러 가지 모색들을 그려내거나 구체화를 도모하는 시도는 하지 못했다. 소심함이 병통이라 내지르지 못한 탓이다. 그런 와중에도 차 벗을 만나러 의정부, 광주, 이천, 괴산, 부산으로 짬짬이 다녔다.

“피 선생 뭐해”
“예~~서울이에요.”
“언제 와?”
“모레 내려가요.”
“주말에 우리 집에 차 한잔 하러 와”
“누가 오세요?”
귀한 차 벗을 만나고 똘 끼와 개그 충만했지만 진지함을 잃지 않은 농염한 다담이 늦은 밤토록 흘렀다.

“선생님! 뭐하세요?”
“풀 뽑아~~”
“한 번 내려오세요.”
집 근처 차방에 둘러 앉아 이 차 까고 저 놈 까면서 놀았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건강하고 생산적인 커뮤니티를 만들 수는 없을까. 뉴비(newbie)들을 위한 심플하고 담백한 아카데미도 필요할 것 같은데…이런 고민을 나누다 피곤해지면 다시 운남이야기로 돌아오곤 했다.

운남은 이렇듯 휴식 이었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고 있으니 다시 다녀와야지. 이번엔 대설산쪽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샹그릴라에서 시작해서 훑으면서 내려 와도 좋겠다. 호도협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사람들 발걸음이 비교적 한적한 서쪽 변방이나 동쪽 변방을 타고 내려오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필름에 남은 흔적들 / Leica MP + Summicron 50mm 4th + 400TX & Minolta TC-1]

나른하고 느린 며칠

2017. 2. 27 ~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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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하고 느린 며칠을 보냈다. 뜻하지 않게 생긴 시간이다. 한 곳쯤 더 다녀와도 될 시간이었지만  제법 지쳐 있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닥친 스펙타클한 일정이었으니까…늘어져 뒹굴거리기로 했다. 일정을 마무리하는 의식 따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텐션을 풀어놓고 며칠 보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늦은 아침을 먹고 마을 산책을 나섰다. 골목 구석구석 쑤시고 다니면서 낡은 흔적을 뒤적였다. 새로 지어진 건물 사이에 흙으로 쌓은 두툼한 담장과 공동으로 사용하던 화장실이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반듯한 콘크리트 건물 담장 아래로 노출된 하수도라거나 그 곳에 오물을 갖다 버리는 아낙들 간혹 눈에 띄었다. 커다란 멧돌이 나뒹군다거나 절구 따위가 대문간에 방치된 것을 보면 아직까지는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 이었다. 마음 닿는 곳에 이르러서는 상상과 공상을 더해서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고, 마실 나온 어르신들과 더듬더듬 소통을 시도했다.

걷다기 지겨우면 차실로 갔다. 이 자리 저 자리 옮겨가면서 차 마시다 배고프면 한상 차려 먹고 또 느긋하게 차나 마셨다. 리리랑 놀다가 방군이랑 차마시다 송문이랑 사진이야기도 좀 하다가 사무실에 들어가서 일하는 친구들 방해도 하다가 기어코 지겨워지면 택시를 탔다. 새로 사귄 풍골에 가서 쇼핑도 하고 시내서 사람 구경 하다가 저녁엔 술친구 만나서 상다리 부러지게 삥 뜯어 먹고 얼큰해져서 돌아왔다. 이렇게 꽉 채운 이틀을 보냈다. 개강날짜가 다가왔으니 내일이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지.

혼자서 며칠 더 계셔야하는 선생님이 걱정이다.
“내일 같이 돌아가시죠?”
“응, 안 그래도 좀 그래”
“저 없으면 재미없으시잖아요? 당주는 안 놀아 주던데…”
“ㅋㅋㅋ 피선생 가고나면 뭐 딱히 할 것도 마뜩찮고…”

스케줄 조정을 서둘러 마치고 꿈 같은 마지막 밤을 맞으러 나섰다. 명흥에 들러 묵은 회포를 배가 찢어지도록 풀었다. 밤의 주인이 바뀔 무렵 불이 다 꺼진 차 시장에 들러 늙은 차를 마셨다. 곡강에게서 차산 이야기라든가 늙은 차 구한 이야기 듣는 것은 흥미진진이다. 보이차 무협지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

곤명. 그 깊은 밤!

2017. 2. 26 곤명으로

사위가 조용하다. 가라앉은 공기가 적막함을 더했다. 좁은 침대공간에서 뒤척이다가 창에 얼굴이 닿았는데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기가 없는 것을 보니 버스는 제법 긴 시간 움직이지 않은 모양이다. 야간 운행시 정해진 시간이 되면 운행이 금지되고 기사들이 쉬어야 한다던 말이 생각났다. 버스안에 사람들이 하나 둘 뒤척이기 시작한다. 정신은 깨어났는데 눈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랫배에 가득찬 액체를 비우고 싶지만 몸도 쉬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물 먹은 솜뭉치마냥 무겁다. 떫은 감을 세 개쯤 씹고 있는 듯 텁텁한 입도 헹구고 싶고 냉수에 머리도 빨았으면 좋겠다. 젖은 창을 발로 문질렀다. 얼마나 왔을까? 주위를 살폈다. 자욱하게 내려 앉은 안개가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지만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아뿔싸! 차에서 내려보니 단지 정차중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까딱 했으면 큰 사고를 당할 뻔 했다. 바로 앞에서 커다란 트레일러가 허리를 접고 도로를 막고 있었다. 지난 밤에 일어난 사고였다. 다행인 것은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이란 것이고 더욱 다행인 것은 사고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시야가 닿는 끝까지 차들이 늘어섰다. 얼마나 막혀있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고속도로를 걷거나 쉬거나 볼일을 보거나 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보내는 사이 날이 밝았다. 이윽고 공안들이 왔고 또 한참을 수석거리다가 아침이 익어서야 길이 열렸다. 밤새 달려왔건만 아직 반도 못 온 모양이다. 눅눅한 길을 달리던 버스는 얼마가지 못하고 다시 정차하고 말았다. 이번엔 무장한 군인들이다. 검속이 만만치 않은 코스인데다 곤명터미널 칼부림 사건 이후 검속이 강화 되었다고 했다. 외국인들만 잔뜩 탄 침대버스가 뜬금없이 새벽을 달리는 상황이 그들을 긴장하게 했을까! 당주와 건군이 긴 시간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했고 거둬간 여권을 한동안 뒤적거렸다. 사진을 찍으려다 그 중 한 녀석과 눈이 마주쳤는데 위협적이었다. 야리는 폼새가 찍지 말라는 거다. 그렇다고 안 찍을 수야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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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렇게 가다가는 돌아갈 비행기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 같다. 떠나올 때도 쉽지 않더니 돌아가는 것도 만만치가 않네.

“피 선생! 같이 며칠 더 있다 갑시다.”
당주도 거들었다.
“일찍 가면 뭐 할 거 있어?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거여!”

일정을 조율해 보지만 결국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건군에게 비행기 스케줄 조정을 부탁했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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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출발한 버스는 오후 1시가 지나서 곤명에 닿았다. 공항난민 신세로부터 꼬박 하루만이다. 일행들도 모두 잘 견뎠다. 뜨거운 물에 샤워부터 했다. 긴 하루였다.

늦은 점심을 먹고 일행은 차 시장 관광을 떠났다. 이런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지난 차우회 때 개발해 둔 차도구점을 소개했다. 죽제품을 주로 취급하는 곳이었는데 인연과 질, 가격 모두 괜찮은 곳이었다. 몇 대의 승합차에 나눠 탄 일행은 지묵당 직원의 안배를 받으며 떠났다. 불현듯 찾아 온 고요와 평화가 주는 안도감이라니. 이럴 때는 차를 마셔야 한다. 차와 함께 삼매에 있을 무렵 반가운 손님이 래방 했다. 곡강을 만나는 건 처음이다. 감로 같은 술과 벗이 함께 있으니 놀기 좋은 밤이다. 늦은 밤토록 먹고 마셨다. 이날 밤 곤명은 몹시 추웠다.

…이어서

곤명으로

2017. 2. 25 / 곤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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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이 없는 날이다. 오늘처럼 손이 비는 날은 찌짐에 막걸리를 마셔야 한다. 아침부터 과년한 남자들이 한방에 모여 앉아 차판을 벌렸다. 보이차가 재미있는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야기 꺼리가 많다는 것이다. ‘오~~차 좋네요.’ 이러고 나면 할 말이 심심한 다른 차들과는 차별되는 점이다. 독특한 역사, 문화, 풍광을 지닌 운남이라는 지역적 배경과 광대하게 펼쳐진 차밭들, 산을 넘을 때 마다 달라지는 족속들과 그들의 차별적 문화, 보이차 시장의 폭발적 성장에 따른 작용과 반작용들, 노차에 얽힌 전설과 실체적 흔적들, 공산화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일어난 질곡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뒤섞여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화수분이다. 까야 제 맛이라고 성토로 끝나기 일쑤인 차판 이야기가 오늘은 무척 건설적이다. 총론은 언제나 옳다. 이해관계가 첨예해지는 각론에서 사단이 나는 거지.

차 마시다 지겨워지자 강가를 어슬렁거렸다. 한적한 곳이라 산책 말고는 할 것도 없다. 사람 구경이라도 하려면 차를 타던지 해야 하니 성가신 일이다. 정돈된 길을 따라 식당과 차방들이 늘어섰고 사이마다 별장들이 무식하리만큼 고급지게 들어앉았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반동이 함께 일렁거렸다. 욕망하지만 땅을 딛고 선 발은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뱉어내지 못한 욕망은 그렇게 반동이 되고 외소하고 영세한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움직였다. 이제 이 여행도 서서히 저물어간다. 돌아가야지. 15시에 출발한다는 비행기가 온다간다 말도 없다. 30분, 한 시간, 두 시간 … 아~~역시 짱꼴라야. 이래야 중국스러운거지. 어째 너무 순탄하다 했어. 당주와 건군이는 잠시도 쉬지 않고 상황을 추적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항공사 대답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항공 경로도 확인하고 날씨도 확인해 보지만 어째 느낌이 좋지 않다. 기다리는 시간은 기약 없이 길어진다. 세 시간, 네 시간 … 일행들은 지치다 못해 꺼져버릴 지경이다. 돌겠네 진짜.

15시에는 떠야하는 비행기가 22시가 되어서야 취소되었다. 느닷없이 28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이다. 당주와 건군이 한참 이야기를 하더니 힘들더라도 오늘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내일도 기상상황이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거니와 나는 내일, 일행은 모래 한국으로 떠나야하니 버스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것이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경에 텐션이 걸린다. 당주와 건군이 상황을 체크하고 스케줄을 조율하는 사이 나는 일행들을 인솔해서 역 수속을 밟아야 했으며 실어 보냈던 짐을 다시 찾아야 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흐트러진 좌중의 멘탈도 수습해야 했고 돌발적인 행동들도 통제해야 했다. 찾아 놓으면 금방 없어지고 또 찾아 놓으면 다른 사람이 사라졌다. 화장실 같다는 사람을 면세점에서 찾아오는 따위의 촌극이 수시로 벌어졌다. 겨우 수속을 마치고 빠져 나왔는데 또 몇 사람이 안보인다. 아이고야~~

“선생님들! 지금부터는 개인행동을 삼가 해 주십시오. 화장실도 혼자서는 안 됩니다. 움직이실 때는 반드시 2명 이상 함께 움직이시고 저나 여기선생님께 이야기하고 움직이셔야 합니다. 이동 간에 서로 착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짐은 각자가 챙겨 주십시오.”

늘어져 꺼질 지경이 되어서야 우리 일행을 태우겠다고 버스가 왔다. 살펴보니 곤명은 고사하고 징홍을 벗어나기도 전에 분해되고 말 것 같은 중형버스 두 대였다. 상황이 점점 꼬여간다. 일행은 스트레스와 기다림에 파김치가 되어갔다. 갖은 삽질끝에 다시 버스를 섭외했으나 징홍까지는 알아서 이동해야 했다. 빵차, SUV, 승용차등 여러 대에 짐과 사람을 실었다.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아직까지 멘붕 상황을 호소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다. 환자라도 발생하면 정말이지 낭패지 않은가. 몇 팀으로 나눠 이동한 탓에 다시 모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들 간에 의사소통 역시 한번 만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후~~이 징그러운 놈들!

한참 만에 이고 진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 여기저기 흩어져 도착한 사람들을 수습하고 보니 하늘이 뱅글뱅글 돈다. 인원파악만 수십 번은 했나보다. 비행기 요금 보다 비싸게 대절한 버스는 침대가 놓인 럭셔리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일행들이 하나 둘 버스에 타는데 버스 기사가 뭐라고 떠들더니 급기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일행 가운데 한 분이 지 놈 자리를 차지했던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일행들이 알아 들을 리 없을테지만 그 놈은 저 하고 싶은 욕지거리를 실컷 쏟아내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일행은 징홍을 출발할 수 있었다. 침대버스가 처음인 일행들은 버스가 출발하자 셀카를 찍는다거나 하루를 회상하는 수다로 다시 시끌벅적하다. 전쟁 같은 시간을 겪은 사람들 같지 않았다. 다행이다. 피곤한 하루였다. 불편하나마 머리를 둘 수 있는 자리를 얻었으니 이제 좀 쉬어야지. 꺽다리(창 사장)가 사다준 옥수수를 빨면서 깜깜한 밤을 달렸다. 오후 내 굶었더니 속이 쓰리다. 차나 한 사발 들이켰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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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포랑산 자락

2017. 2. 24 포랑산, 노반장

젖은 솜덩이처럼 몸이 무겁다. 천근만근 머리가 지끈거린다. 새벽까지 달리신 선생님은 체력이 국력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다. 언제나 가뿐한 아침을 맞고 계신 듯하다. 지난밤은 겨드랑이에서 바람을 너무 많이 일으켰다. 버스 뒷자리에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한참을 달렸을 것인데 그 사이 도끼로 쪼개는 듯 아픈 머리와 마가린과 버터를 비벼서 두 대접쯤 들이킨 듯한 속을 부여잡고 몇 번이나 지옥문을 들락거렸다. 아이고 머리야~~그러게 작작 좀 퍼 마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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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랑산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딱 좋아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으나 두 발짝 옮기는 것이 곤란한 컨디션에는 도리 없다. 두어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거리로 나왔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 몇 컷이라도 찍어 볼 요량이다. 이마를 뚫을 듯 태양이 작열한다. 작열하는 거리를 뒤틀리는 속을 부여잡고 걷기는 어려웠다. 한 블록쯤 갔을까. 식당 옆 석모가게 그늘에서 주인아저씨랑 노닥거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버스는 다시 자갈이 빼곡하게 깔린 길을 달렸다. 노반장까지 대형버스로 간다? 상상하기 어렵지만 현실이다. 변화의 속도와 크기를 극명하게 대변하는 증거로 이보다 더 간명한 것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비만 좀 와도 접근이 어렵던 마을이었다. 이렇게 궁벽한 곳까지 자갈로 포장된 길이 열렸다. 어렵긴 해도 꾸역꾸역 버스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버스회사엔 포랑산 입구까지만 간다고 계약한 모양이다. 이 곳까지 가자고 하면 택도 없을 것이었다. 희뿌연 흙먼지와 함께 아련한 어떤 것들이 함께 빨려 나가는 듯 사그러 들었다.

노반장 보다 노만아에 머물거나 적어도 들러 갔으면 싶었다. 지금은 사라진 복족의 후예들이 가장 먼저 차를 심었다는 곳이다. 인근 마을에서 수백 년 된 차밭을 갈아 엎어 옥수수를 심을 때 조차 조상나무를 벨 수 없다며 기꺼이 배 곯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지킨 차밭이 건재한 곳이다. 운남땅 흙 한번 밟아보지 않은 제갈량을 신으로 숭상하면서 그에게 전수 받은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 최초 차농의 후손답게 차나무를 가꾸고 지켜낸 사람들이 노만아에 살고 있다. 길고 긴 세월동안 전쟁과 돌림병을 피해 산을 넘어 마을을 다시 이룰 때 마다 가장 먼저 차나무를 심었던 사람들이다. 이렇게 번진 차나무들이 마을마다 차왕수가 되었을 것이다. 노만아 차 맛이 지독하게 쓴 까닭은 쓰디 쓰게 살아 온 그들 조상의 역사를 배태한 까닭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금싸라기보다 비싼 이 곳의 차나무도 노만아에서 왔다.

버스가 부서질 것 같은 길을 돌고 돌아 무뢰배 두목 같은 패루 아래서 내렸다. 노반장이란 커다란 패찰을 마빡에 이고 선 폼새가 생뚱맞기 이를데 없다. 유명하다 못해 관광지가 되어 버린 이곳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실경을 목도하는 것은 차가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마을 가운데를 가로 지르며 새로 닦아 놓은 너른 시멘트 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진승차창 초제소가 점령의 흔적처럼 버티고 있다. 몇 걸음 더 들어가니 인민폐 자판기까지 육중하게 들어 앉았다. 자본은 돈이 되는 곳을 제발로 찾아간다. 철이 되면 마오를 이고 진 인파들이 구름처럼 들이 닥친다고 하지 않던가! 마을로 들어서니 집집마다 커다란 번호를 달고 있다. 찻잎 무게보다 더 무거운 인민폐로 치환되는 차나무가 해마다 순을 터트릴 즈음이면 이 번호들은 각각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로또가 된다. 누구네 아버지가 아니라 몇 호집으로 불리는 아재들은 목에 두른 금붙이 두께만큼이나 무거운 배를 실룩 거리게 되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지난 세월의 보상이라면 더할 바 없겠다. 마을마다 있는 차왕수를 본다고 일행들이 사라진 틈에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고쳐지은 집들은 거대 했고 마당엔 그만큼 거만한 자동차가 드러 누워 있었다. 간혹 만나는 사람들에게 목례를 해 보지만 외지인은 이미 호감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모차 값 걱정을 하다말고 당주에게 말했다.
“해마다 때 되면 차떼기로 돈을 싣고 와서 줄을 서는데…사람들이 돈을 더 못 줘서 안달이라니…턱 괴고 앉아서 손님 골라 받으면 되는 … 딱 일년만 이 사람들처럼 살아봤으면 좋겠어요. ”
“그건 나도 그래!”

돈은 돈이 되는 곳을, 글은 글이 되는 곳을, 인은 인이 되는 곳을, 덕은 덕이 되는 곳을 저절로 찾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니 내가 돈이면 돈이 올 것이고, 문이면 문이 올 것이며, 인이면 인이 올 것이고, 덕이면 덕이 제발로 찾아 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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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죽음이 되어서 징홍으로 돌아왔다. 반나에서 마지막 밤이니 곱게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징홍은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삐끼도 없고 강요도 없다. 표정은 밝고 행동은 친절하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야시장이지만 깨끗하고 밝아서 좋다. 땀으로 빠진 원기를 보충하는 데는 빠이주가 직빵일테지만 오늘 저녁은 삼겹살에 소주다. 살짝 그 분이 오실쯤 과분하게 좋은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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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멍하이

2017. 2. 23 / 운차원, 맹해지묵당차창

운전을 맡아주던 꺽다리가 사라졌다. 저 볼일이 있을 것이다. 타고 다니던 차도 상태가 장난 아니니 고치기도 해야 할 것이다. 육대차산에서 뽕을 뽑지 못한 아쉬움과 대형버스로 집단관광(?)을 해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아침에 맹해로 간다.

2년 만에 맹해는 시골도시 틀을 완전히 벗어 던진 모습이다. 도시로 이어진 도로나 지어지는 건물들의 규모는 산업도시의 발전을 보는 듯하다. 황금 빌딩이 즐비하게 들어서는 마천루를 보면서 나는 늘 퇴행적 희망을 품었다. 오래된 모든 것이 전통이란 이름으로 미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그때 그래서 더 좋았는데…’라고 추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는 여행자의 몫이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맹해는 지금 21세기에 부활하는 총차점의 영광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더불어 그들에게 다시금 개토귀류의 슬픈 역사가 재생되지 않길 바랄뿐이다. 황금은 옹정제의 권능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보이차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맹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설레임이다. ‘운남중국다엽무역주식유한공사(운남중차공사)’는 일본과의 전쟁 통에 세워졌다. 다른 전선과는 달리 아직 운남은 전장의 상흔에 오염되지 않았던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풍부한 차 자원과 지리적 장점, 여기에 전쟁이라는 특수가 더해져 맹해는 삽시간에 보이차 가공과 보급 기지로서 최고의 지위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운남중차공사에서 파견된 범화균이란 인사는 불해차창을 세우고 차의 운송과 판매를 전담할 조합을 만들었다. 국민당 정부를 뒷배로 불해차창은 아직 공장을 올리지도 않은 채 이미 엄청난 양의 차를 전매하여 유통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불해차창에서는 차가 한 톨도 생산되지 않았다. 일본의 공습이 맹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범화균은 직원들을 데리고 맹해에서 철수했다. 그는 살아생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세운 차창은 ‘맹해차창’이 되었다. 지난 세월동안 맹해차창은 최고, 최대의 차창으로 보이차의 역사가 되었다.

 

버스 뒷자리에 늘어져 뒹굴 거리는 사이 ‘운차원’에 도착했다. 맹해에 다녀가는 차꾼이라면 ‘맹해차장’과 ‘운차원’은 한번쯤(만) 다녀 가야하는 곳이다. 운차원에서는 신식다원의 원형과 다양한 품종의 차나무를 관찰할 수 있다.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거대한 땅에 조성된 다원과 연결공간에 조성된 역사관, 체험관 따위를 둘러보는 것은 마치 민속박물관에 들러 전통을 공부하는 효율을 누리는 것과 같다. 깔끔하게 꾸며진 쉴 곳과 먹을 것이 있고 전기차를 탄다거나 말을 탄다거나 하는  놀 꺼리도 있다. 굽이굽이 첩첩산중 다니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차공부 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필자는 반듯하게 조성된 이 따위 공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차까지 타면서 금싸라기 같은 하루를 죽이고 있는 것 같아 맘은 바쁘기만하다.

다시 지묵당맹해차창에 왔다. 차창입구에 있던 스레트 지붕의 허름한 구판장은 허물어지고 커다란 창고건물이 들어섰다. 차창마을 젊은 친구 두 녀석이 합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 옆에 태족 전통가옥을 짓고 번듯한 차실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들 타고 다니는 차도 근사하게 바뀌어 있었다. 불과 2년 만에 바뀐 모습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차창 식구들은 그대로다. 이곳에 그냥 며칠 눌러 앉았으면 좋으련만.

징홍으로 돌아왔다. 회소에 들러 꺽다리와 차를 마셨다. 여전히 검붉은 잇몸을 시원하게 드러내며 웃는다. 이 친구에게 고자질 하듯 하루를 투덜거렸다. 좋은 차를 낼 테니 기분전환 하라는데 은근히 차 자랑을 시작할 모양이다. 훌륭한 차였지만 짐짓 차품을 말하지 않고 뭉그적거렸더니 먼저 안달이 나서 호들갑이다. 만전 가을차라고 했다. 단주차 5키로 구했다는데 세상을 다 얻은 표정이다. 대상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지극히 아름답다.

바나나 잎을 깔고 뜨거운 저녁을 먹었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겨드랑이에 바람이 솔솔 일어난다고 했던가(七椀喫不得也唯覺兩腋習習淸風生). 옛말 그르지 않다더니 노동盧仝선인의 선견지명이 탁월하다. 고기안주에 뜨거운 빠이주 일곱잔이면 신선이라도 되겠다. 흠뻑 취해 어제 그 호텔에서 쓰러졌다.

 

 

… 이어서

 

역사의 뒤안길

2017. 2. 22 고육대차산_만전, 이무, 마흑, 이무고진, 유락을 지나 다시 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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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흥호 옛 터에서 동흥호를 본 적도 없는 젊은 아낙이 동흥호를 팔고 있었다.]

04:30 닭이 운다. 한 놈이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동네 닭들이 모조리 나선 모양이다. 계통 없이 짖었다. 뒤척이다 창을 열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길에 트럭과 오토바이가 간혹 먼지를 일으킬 뿐 마을은 아직 새벽잠에 젖었다. 따끈한 물을 뒤집어 썼다. 안개 맞으러 나가 볼 작정이다. 아침 공기에서 흑백필름의 그레인처럼 입자감이 느껴진다. 잔뜩 쟁여온 필름이 아직 그대로다.  주마간산으로 지나는 통에 지긋하게 속살에 닿을 틈이 없었다. 지나다가 맘에 맞는 곳이 있으면 엉덩이 붙이고 눌러 앉아야 한다. 소통의 끈을 잡지 않고 셔터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여명의 고요한 아침은 그래서 소중하다. 허락된 혼자만의 시간, 독락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카메라를 들쳐 업고 새벽을 걸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조차 낮선 이가 새벽을 어슬렁 거려도 더 이상 낮선 풍경이 아닌 모양이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목례를 건내 보지만 돌아오는 인사가 박하다. 시즌이 되면 방방곡곡에서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될 것이다. 차 덕분이다. 드물지 않게 貢茶라고 쓰여진 간판을 만난다. 황제에게 바친 차라는 것인데 아직까지 마을은 옛 그림자를 먹어야 견딜 수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구라성 짙은 간판을 보면 오히려 안심이 된다. 안개만큼이나 짙고 두툼한 욕망이 차산마을에 내려앉았다. 두 달쯤 지나면 차보다 돈이 흔해질 것이다. 큰 길을 따라 마을 끝까지 걸었지만 도타운 장면을 만나지 못했다. 날이 밝을 무렵 객잔 옆에서 허름한 식당에서 미시엔을 마시고 만전으로 향했다.

차산 친구들 차를 나눠 타고 일행들이 먼저 떠났다. 우리는 아직 꺽다리(창사장)가 있으니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다. 일행이 차밭으로 떠난 사이 꺽다리는 우리를 ‘권기호權記號차장’으로 안내했다. 이 친구가 아이었다면 여기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號’가 붙었길래 죽천향님께 물었다.

“(의미심장하게) 이게 그 호에요?”
“(같은 표정으로_음흉하게) 응. 권기호도 있었어!”

호급 시대의 영광을 나눈 역사의 편린이었다. 3대째 전승(?)자가 지키고 있는 차장은 시간의 그림자가 길게 내려 앉아 있었다. 떠난 버스와 떠난 영광을 돌려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순박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불쑥 들이 닥친 손님이 싫지 않은 것 같다. 꺽다리는 이미 인연이 있는 눈치다. 곱게 만든 묶음차를 마시면서 선생님과 내가 호급차 이야기에 빠져있을 때 꺽다리는 할아버지와 쇼부 볼게 있는지 정탐할게 있는지 짐짓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영감님! 모차 남은 거 있으면 좀 봅시다.”
늦게 합류한 당주가 말했다. 흥정이 되나 싶더니 두 마디도 안가서 거래는 끝나버렸다. 당주는 시세보다 두 배를 줬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달라는 것에서 딱 반이지만 뭐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알아야지.

덜컹덜컹 이무로 향했다. 보이차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로망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다지 않던가! 역사의 단물을 빨고 있는 변방의 남루한 마을이라지만 아우라가 어디 갈 것 같지는 않았다. 민국 초까지 이곳은 보이차 생산과 물류의 중심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침이 고이는 차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는 고진에서 차마고도의 출발이었던 돌길을 걸어보길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공산당 세상이 되면서 차장은 전멸했다. 개인이 차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차를 만들어 국영공장에 상납하는 것이 이들에게 부여된 과업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남은 노하우는 멸절되고 말았다. 1990년대가 되어서야 뜻 있는 대만사람과 전직 향장의 노력으로 전통방식(?)을 재현해 냈다고 한다. 때마침 불어 닥친 보이차 광풍과 함께 비로소 이무의 재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커다란 패루에 서서 옛 영광을 생각했다. 비닐봉지 따위의 쓰레기가 먼지바람에 뒹굴었다. 말라비틀어진 천년고차수가 오늘 이무의 자화상 같다고 생각했다.

천년고차수를 만나고 마흑마을을 잠시 들렀다가 이무고진으로 향했다. 꺽다리도 고진은 초행인 모양이다. 하기야 사업상 다니는 사람이 돈 안 되는 곳을 애써 기웃 거려야 할 이유 따위가 있을리 없다. 동경호, 동흥호, 동창호, 복원창호, 차순호 등 이름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흔적들을 만났다. 동흥호 옛터에서 마신 차 한잔이 유난히 쓰다. 고태가 흐르는 집에 조그만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전통이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뒷뜰에서 열심히 찍었을 그 때 그 차를 이 자리에서 마셨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허약하고 남루한 흔적이다.

마오가 지켜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유락을 들러 징홍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