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札幌)에서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전날 쿠시로(釧路)를 떠나 밤 늦게 도착한데다 열흘 가까이 누적된 피로가 상당했지만 일찍부터 길을 서둘렀습니다. 홋카이도(北海道)를 계획하며 꼭 들러야겠다 생각했던 요이치(余市)에 가는 날이었습니다.
요이치는 삿포로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로, 일본의 양대 주류 회사 중 하나인 닛카위스키(ニッカウヰスキー)의 요이치증류소(余市蒸溜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당주 다케츠루(竹鶴)씨와 리타(Rita)여사의 사랑이라던가, 쇼와(昭和)시대에 대한 일본인들의 향수로 인해 종종 드라마에 나오는 곳이라고 합니다.
삿포로는 일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라는데, 홋카이도의 다른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정취를 풍겼습니다. 획일적으로 그어진 구획과 도심을 가득 채운 지나치게 큰 건물은 어딘지 삭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외곽은 외곽대로 쇠락한 분위기를 풍겨서 또 다른 의미에서 삭막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어쨌든 길을 점령한 까마귀들과 – 듣던대로 거대하더군요 – 쇠락한 부심을 돌아보며 기차를 타고 오타루역(小樽驛)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남아 역사 앞을 서성이다 요이치행을 타러 갔습니다.
요이치행 열차에는 이벤트 칸이 있었는데, 홋카이도에 사는 동물들로 장식된 좌석이 있었습니다. 뭔가 즐거운 기분으로 앉아서 풍경을 구경하다가, “이곳은 포토존입니다.”라는 설명을 듣고 본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오타루에서 요이치로 이어지는 해안선은 태평양을 바라보며 달립니다. 동쪽 끝에서 본 태평양을 떠올리다보니 어느새 요이치역에 도착했습니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타케츠루 마사타카(竹鶴 政孝)씨는 스코틀랜드에서 유학했는데, 스카치 위스키에 반해 스스로 위스키 생산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와 환경이 가장 비슷한 곳을 찾아 일본 전역을 헤매다, 1934년 요이치에 증류소를 짓고 위스키를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공장들은 지금까지도 남아 그 당시 공법 그대로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스코틀랜드에서도 중단한 석탄 증류 방식을 요이치에서는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건조동, 당화동, 발화동으로 이어지는 시설들을 구경하고 리타 하우스(Rita House)에 도착했습니다. 리타여사는 다케츠루씨가 유학 중 만난 일생의 사랑입니다. 다케츠루씨는 아내를 위해 스코틀랜드의 집을 그대로 일본까지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 집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리타여사는 이곳에 살면서 남편과 함께 위스키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종과 하루를 마치는 종을 손수 울렸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요이치에서는 “리타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아침 저녁 종을 울린다고 합니다. 40대 후반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리타여사가 없었다면 닛카도 없었겠지요.
대체 어떤 여성이길래, 라는 기분으로 두 사람의 사진을 들여다봤습니다. 낡은 흑백사진 속에 한 여성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딘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장고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습니다.
어느 건물 앞, 아이가 기웃거리는 모습을 쫓아 건물안에 들어서니, 한켠에 쌓인 캐스크(Cask)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연도별로 구분된 캐스크들을 들여다보다,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익어갈 위스키의 맛이 궁금해졌습니다. 저 술이 익을 때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요이치증류소에서는 두 곳의 시음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일 세 종류의 닛카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무료 시음소와 빈티지 및 상위 라인의 현행들을 마실 수 있는 유료 시음소입니다. 유료라고 해봐야 싱글샷 기준 빈티지가 700엔, 현행 300엔의 말도 안되게 저렴한 가격입니다.
무심코 유료 시음소에 갔더니 노(老)바텐더가 “무료 시음소를 먼저 들러주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술을 나중에 맛보라는 뜻인가보다, 생각하며 무료 시음소로 향했습니다.
무료 시음소 안에는 세 종류의 위스키가 담긴 수 백개의 글래스와 미즈와리(水割り)를 위한 물, 언더락을 위한 얼음, 우롱차가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 종류의 위스키 당 한 잔을 권장한다고 써있지만 더 마신다고 제재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방문했을때는 수퍼 닛카(Super Nikka)와 퓨어 몰트(Pure Malt), 올 몰트(All Malt)가 제공되고 있었습니다. 기꺼운 마음에 싱글과 언더락을 한 잔씩 마셨습니다.
마지막 싱글로 수퍼 닛카를 한 잔 더 청해 요이치의 풍경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향기로운 위스키의 향과 요이치의 정취에 속절없이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층의 판매소에서 요이치 12년과 싱글 몰트, 수퍼 닛카를 한 병씩 구입하고 유료 시음소로 향했습니다.
빈티지를 청하고 老바텐더의 닛카 얘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요이치 12년은 요이치증류소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데, 하루 100병 한정으로 판매한다고 하셨습니다. 닛카 위스키 중 유일하게 요이치의 보리와 물과 공기로만 빚기 때문에 생산량이 적을 수 밖에 없다고, 잘 구입한거라는 칭찬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다케츠루조차 센다이(仙台)의 보리로 빚는다고도 하셨습니다.)
술이 오르기 시작해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또 오겠습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
삿포로에 돌아와 삿포로맥주박물관(サッポロビール博物館)으로 향했습니다. 요이치의 향취에 충분히 취해있었지만 삿포로에 와서 삿포로맥주를 마시지 않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박물관이 쉬는 날이었지만, 다행히 비어 가르텐(Beer Garten)은 정상영업중이었습니다.
근사한 분위기를 뽐내는 거대한 홀에서 두 종류의 양고기 징기스칸과 맥주 무제한 메뉴를 맛봤습니다. 양고기를 무척 좋아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삿포로 생맥주의 맛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구요.
얼큰하게 취해 시내 중심가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대로는 아무래도 아쉬워 스미레 삿포로혼텐(すみれ 札幌本店)을 찾아갔습니다.
어느 선배님의 표현을 빌자면, “면과 미소 수프만으로 승부한지 51년 된” 라멘집입니다. 교토(京都)점은 여러번 갔었지만 본점은 처음이었습니다. 얼마나 차이가 날까 기대반 의구심반이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불허전이란 이런데 쓰는 말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미소(味噌)와 시오(しお)라멘입니다.
늦은 밤, 배를 두들기며 전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삿포로 – 홋카이도에서의 마지막 날, 호스텔 복도에서 꽤 맘에 드는 격언을 발견했습니다.
“Eat Well Travel Often”
어쩌면, 인생의 격언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그래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짐을 챙겨 특급을 타고 하코다테(函館)역으로, 다시 수퍼하쿠초(スーパー白鳥)로 갈아타고 신아오모리(新青森)역에 도착했습니다. 잠깐 시간이 남아 역 안을 구경하고 신칸센(新幹線) 하야부사(はやぶさ)를 타러 갔습니다. 아오모리까지 와서 사과 한 조각 못먹고 가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 도쿄((東京)행 열차에 올랐습니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