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하늘

네무로(根室)에서의 셋째날이 밝았습니다. 동쪽 끝까지 왔으니 이제부터는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3일간 편안히 묵었던 민박집을 떠나 역으로 향했습니다. 아침 일찍 기차여서 주인에게 인사를 못한게 못내 아쉬웠습니다.

낡은 풍경의 시내를 걸어 도착한 역에서 쿠시로(釧路)행 한량을 타고 계곡 사이로 난 간이역을 지나쳐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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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역인가 싶으시겠지만, 정식역이 맞습니다. 다만, 승객들이 역사안에 앉아있거나, 역사를 통과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을 때 잠시 피하는 셸터(Shelter)에 가까운 것 같았습니다.

네무로로 향할 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귀여운 역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넣었습니다. 이 곳까지 다시 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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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로역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쿠시로습원(釧路湿原)역에 도착했습니다. 쿠시로습원은 약 2만ha에 달하는, 일본 최대의 습지이자 국립공원입니다. 아시아에서는 3번째로 큰 습지입니다. 1980년 람사르습지로도 등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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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로 지어진 간이역을 벗어나 계단을 오르니 넓은 숲이 나왔습니다. 호소오카(細岡) 비지터스 라운지에 들러 홋카이도산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우유만큼이나 매혹적인 맛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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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오카전망대에서 쿠시로의 하늘을 만났습니다. ‘큰 하늘’이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긴 탄식을 하며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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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어 호소오카역으로 향했습니다. 민박집 안내를 구경하는데 한량이 지나쳐갔습니다. 네무로행 한량처럼 루팡3세의 에피소드가 그려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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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인근의 카누 선착장에서 도로(塘路)호의 하늘을 만났습니다. 낮게 떠있는 구름을 보며 또 다시 긴 탄식을 했습니다. 이대로 무작정 머물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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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를 서성이는데 수달 한마리가 발 앞 물에서 나와 눈을 마주쳐왔습니다. 그다지 사람을 경계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길고양이마저 사람을 피하는 우리나라의 골목 풍경이 떠올라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정했던 노롯코(ノロッコ)열차 시간이 되어 호소오카역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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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롯코는 JR(Japan Railroad)에서 운영하는 관광열차인데, 밖을 내다보기 좋은 넓은 창과 목재 의자를 갖추고 있습니다. 조명은 구식 전등입니다. 봄, 가을에는 하루 1회, 여름에는 2회 왕복하고, 겨울에는 운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토(京都)의 아라시야마(嵐山)에서 만날 수 있는 도롯코 열차와는 친척 쯤 되겠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풍경과 승객들을 쳐다보고 있으니, 승무원이 다가와 상장처럼 생긴 승차증명서를 발급해줬습니다. 이런 이벤트를 참 잘하는군,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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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역에 도착해 노롯코에 손을 흔들었습니다. 돌아갈 때도 탈 계획이어서 영영 이별은 아니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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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로습원의 여러 전망대 중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는 사이, 역 앞 대여 자전거가 동이나버렸습니다. 하릴없이 걸어서 사루보(サルボ)전망대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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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자전거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터벅거리며 걸어다니기에 좋은 길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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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나이를 먹었을 숲을 걸어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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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서 다시 ‘큰 하늘’을 만났습니다. 눈이 맑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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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한량이 달려가는 모습을 좇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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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길을 되돌아 도로역으로 향했습니다. 쿠시로역으로 데려다 줄 노롯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느긋하게 풍경을 즐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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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면 한 장면, 쿠시로의 ‘큰 하늘’을 눈에 새겨넣었습니다. 꼭 다시 와보고 싶었지만, 쉽게 올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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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로역에 도착했습니다. 삿포로(札幌)행 열차가 출발하기까지는 시간이 넉넉했습니다.

시내를 걸어 항구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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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일본의 3대 항구에 들어갔다는 쿠시로항은 대단한 크기였지만, 쇠락해가는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무척이나 큰 항구에 배가 듬성듬성 떠있는 풍경이 쓸쓸해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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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준비중인 배 앞에 잠시 멈춰섰다가 누사마이바시(幣舞橋)의 뒷편으로 향했습니다. 쿠시로의 또 다른 볼거리인, 안개 낀 네온등의 풍경을 자랑하는 다리입니다만, 밤이면 떠나야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더 깊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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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던져 준 물고기를 뜯던 갈매기가 저를 보고는 무심한 척 멈춰섰습니다. 방해가 된 것 같아 자리를 비켜줬습니다.

쿠시로에서의 저녁을 먹으러 로바다야끼(炉端焼き)집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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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배님의 설명으로 알게 되었는데, 로바다야끼는 쿠시로가 원조라고 합니다. 쿠시로식 로바다야끼는 은근한 숯불에 각종 해산물과 육류를 구워먹는 음식이었습니다. (90년대 한국에서 유행한 로바다야끼는 이름과 달리 버터로 범벅을 한 철판요리였습니다.) 원조의 맛이 훨씬 맘에들었습니다.

로바다야끼에 곁들여진 쿠시로 특산 사케를 마시고 훠이훠이 쿠시로역으로 열차를 타러 갔습니다. 홋카이도에서의 마지막 도시, 삿포로행 열차였습니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