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사진’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벅찬 나에게 ‘필름’은 높고 높은 경지였다. 아날로그로의 회귀, 역행, 부활… 이런 말은 도무지 와 닿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사용하던 전자동 필름카메라가 아주 희미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에게 필름은 추억을 되새겨주는 과거의 친숙한 단어가 아니며, 아날로그라는 편안한 감성의 상징도 아니며, 그저 신세계일 뿐이었다.
난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고, 이왕 찍는 거 정확하고 쨍하게 보기 좋은 사진을 만들기 위해 육중한 풀프레임 DSLR과 몇 개의 렌즈, 외장플래시를 장만하며 사진을 취미라 말하게 된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카메라가 알아서 지원해주는 측광과 AF에 의존하여 원하는 장면을 난사한 후, 가장 괜찮은 사진의 RAW 파일을 정성스럽게 후보정하면 맛깔 나는 사진이 되는 재미를 붙여가면서, 필름 효과의 보정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VSCO 프리셋을 사용하면서 수 십 가지 필름 효과를 종류별로 적용할 수 있으니, 디지털 시대의 필름은 불필요한 행위였고, 손맛이라면 모르겠으나 결과물을 가지고 말할 때 필름은 허세라고도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필름으로의 입문을 유도한 것은, 돌이켜보니 SNS의 역할이 컸다. 사진을 좋아하는 후배를 시작으로 건너건너 친구 맺기를 하면서 의외로 필름 유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다양한 필름사진의 결과물을 자세히 보면서 예전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일단, 기존의 편견과 다르게 필름사진의 결과물들이 디지털과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선명했다. 게다가 , 디지털로 필름 흉내를 낼 때와는 다른 좀더 무게감 있는 표현이 느껴졌다.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점이 별 단점이 아니었고, 디지털로 치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장점은 디지털스러운 느낌적 느낌이 아닌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본연의 장점이라고 느끼게 된 것이다.
다소 자기 취향적이지만, 강렬하고 분명하게 다가왔던 그 느낌과 함께, 필름사진을 하는 동호인들끼리의 품격 있는 소통과 위트가 부러웠으며, ‘같이 놀고 싶다’라는, 본능 같은 충동이 발동하였다. 수차례의 밀당 후, 그런 마음을 들킨 것인지… PIYOPIYO님의 “이쯤에서 함께해요♡” 라는 운명 같은 댓글 한 줄. 그게 시작이었나 싶다.
2017년 7월 2일 일요일, 경복궁역.
PIYO님의 가열 찬 가이드로, 순식간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고, 나에게 Leica M2와 Summaron 을 물려주실 분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전날 밤을 설치는 마음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장소를 헷갈리는 실수 때문에 약속시간에 한참 늦는 결례를 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가운 인사와 대화로 시작하여 기초적인 필름 카메라 작동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들은 후, 바로 옆 경복궁으로 내달렸다. 전 주인님의 맑은 날, 흐린 날 별로 필름ISO-조리개-셔터스피드의 대략적인 측정치를 설명 듣고, 노출계 없이 조리개 값과 셔터스피드를 설정하였다. 이중상은 잘 안 보이고, 전 주인님의 설명대로 무한대를 초점거리 끝에 맞추고 과감하게 셔터를 눌렀다.
Leica M2, Summaron 35mm f/2.8, Ilford FP4 plus 125
이 사진은 정확히 세 번째 컷이다. 운명의 첫 번째 컷은 공개하기 민망하므로… 그러나 그 첫 사진은 나의 뇌리에 평생 기억되어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눌러대기를 두 시간. 운명의 36컷을 이렇게 한달음에 찍을 줄은 몰랐다. 분명 그저 그런 사진들일 테고, 아마 절반 이상은 부정확한 노출 때문에 엉망일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첫 소개팅의 설렘과 비견할 만한 짜릿한 시간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그 비가 그냥 고맙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일요일에 문을 여는 현상소가 있다는 전 주인님의 말이 번뜩 생각났다. 그 말을 들을 때는 ‘뭐 그렇게까지야.’ 라고 혼잣말했지만, 호기가 발동했고, 결국 그 호기는 ‘오늘 카메라 받고 오늘 찍고 오늘 현상하고 오늘 스캔해서 오늘 찾고, 오늘 SNS에 공유함’이라는 디지털 사진에 버금가는 스피드로 나를 몰아갔다.
이런 스피드라니… 초반의 질주가 이어져, 2017년 10월 2일 현재 정확히 3개월, 필름 사진 90일을 맞아, 난 정확히 50롤의 사진을 현상, 스캔하였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가교, 필름스캐너.
필름 사진을 이런 스피디한 디지털 시대에 재미있는 취미로 삼을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필름스캐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현상-인화의 절차가 현재는 같은 필름 사진이지만, 현상-스캔 이라는 절차로 치환되었다. 물론, 진정한 아날로그의 맛을 더 느끼려면 아날로그 인화를 해봐야 하겠지만, 나 같은 입문자가 필름 사진을 찍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공교롭게도 아날로그 사진을 스캔을 통해 디지털화하는 것이었다. 애써서 아날로그 사진을 찍고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버리면 무슨 소용이겠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중요한 건 원본! 디지털 사진의 원본이 센서에 기록된, 아직 색역이 대입되지 않아 눈으로 볼 수 없는 RAW 신호이라면, 아날로그 사진의 원본은 필름에 기록된, 아직 현상되지 않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필름 그 자체다. 원본이 다른데, 그 과정에서 스캔을 하던 인화를 하던 결과물은 다를 수밖에 없다.
스캔하여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진 필름사진. 이 사진은 작금의 디지털 이미지들과 동일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회자되며, 복사되고, 저장된다. 원본만 아날로그이지 디지털 사진들과 동일한 편의성과 스피드를 옷 입은 셈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쓸 만한 필름 스캐너들이 단종 되었고, 정밀한 고품질 스캐너들은 값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필름 동호인들이 많아져서, 접근 가능한 괜찮은 필름스캐너들이 많이 양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필름스캐너 덕분에, 난 오늘도 아침 출근길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B급사진 커뮤니티에 올라온 따끈따끈한 필름사진들을 감상하고 환호하며, 나의 사진을 반성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라이카와 콘탁스
필름, 사진, 재미 다 좋지만 결국 장비의 문제로 귀결되는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치러야 할 비용까지 고려하면 장비를 결정하고 구하는 일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장비 구입은 입문자에게 항상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나를 이 세계로 인도해 준 가이드의 지침을 최대한 따르려 했다. 운명과 인연, 타이밍… 난 이 단어들을 늘 사랑한다. 방황과 고민이 있을 때 항상 무언가에 나를 떠맡기는 것. 그 편안함을 표현하는 이상의 단어들이 없다. 처음엔, 라이카 바디 하나에 35mm, 50mm, 그리고 추가로 21mm 정도를 생각했다. 하지만 가이드의 취향을 바탕으로 한 선험적 지침들은 결국 콘탁스 바디와 칼자이스 올드 렌즈들에 관심을 향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50mm를 선택하는 과정이 가장 그랬다. 이왕 필름하는 것 올드 렌즈로 시작하자는 생각에, 35mm Summaron, 50mm DR을 노렸으나, DR이 생각보다 잘 구해지지 않고, 좋은 가격에 등장한 현행 50cron을 덥석 물었다. 그리고 모든 지름을 접고자 했으나, 50mm 올드 렌즈에 대한 미련이 남아, 결국 Sonnar 를 마음속에 넣게 되었고, Amedeo 어댑터를 찾다가, 어댑터보다 가격이 더 저렴하게 나온 Contax IIa 바디를 손에 넣게 되었다. 결국, 21mm 도 칼자이스 렌즈를 선택해야 하는 당위성이 생겼고, 아래 두 포스팅을 탐독한 후 Biogon 21mm 구입을 결정하게 되었다.
Carl Zeiss Biogon 21mm f4.5 for Contax
Contax IIa and Carl Zeiss 21mm biogon f4.5
좌충우돌, 서툴지만 열정적이었던 연애
이제 입문한지 정확히 3개월. 생물학적 연애기간과 비슷하게, 호르몬 충만한 호기심과 충동의 연속이었던 시간, 그야말로 좌충우돌이었다. 가장 세심하게 셔터를 눌러댄 8월 말의 어느 날엔, 로딩 실수로 단 한 컷도 건지지 못하고, 필름 한 통을 날린 적도 있다. 로딩 후 필름 감을 때 같이 감겨야 할 필름 축 리와인딩 노브 돌아가는 것을 36컷 째 찍을 때쯤 이상하다 싶어 확인해 보니, 심혈을 기울여 눌렀던 36컷이 모조리 헛돌고 있던 것이었다. 알고 보니 누구나 한 번쯤 겪는다는 실수였다. 단순한 일회성 실수라고 넘기기엔 당시 나의 마음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노출이 부족한 곳의 사진들에선, 먼지 제거하는 게 가장 큰 곤욕이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라는 말을 되뇌면서 거북목처럼 길게 내빼고 모니터를 향해 있는 나를 보는 가족들의 측은한 시선에 맞서며, ‘내가 이러려고 포토샵을 배웠나’ 하는 자괴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외장노출계로 측정한 후, 1. 셔터스피드 맞추고 2. 조리개 조이고 3. 초점 링 돌리고. 초기엔 이 세 가지 행위에서 왜 꼭 하나씩 빼먹었는지… 특이한 건 세 가지 중 빠진 요소들의 비중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 셔터에 손가락 살짝 얹으면, 측광과 포커싱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면서 iso, 셔터스피드, 조리개값이 단번에 설정되는 디지털 카메라의 기술이 새삼 위대하게 느껴졌다.
스캔 작업에 대해선 너무 할 말이 많지만, 모두들 겪어내신, 재미없고 지루한 경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좌충우돌 상황도 나의 생물학적 연애감정을 누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바보 같으면서 역동적이었던 순간순간들이 지금의 시점을 있게 한 초석들이며, 앞으로도 이 취미를 오래 유지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습관일 것이다. 내가 두려운 것은 90일, 100일을 기점으로 식어가는 인간 본능의 호르몬 반응. 90일간 50롤을 찍었던 나의 스피드는 10월 들어 6일 현재까지 단 한 롤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걱정스럽지만, 잠시 쉬어가며 나를 정리하는 시간으로 삼고자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고 볼 일이지만, 생물학적 호르몬 반응을 뺀 피질의 고차원적 사유와 충동적이지 않은 내면의 인간성을 이용한 진득한 연애를 이어가길 바란다.
四렌四色
선배들의 작례에 비하면, 한심하고, 갈 길 멀고, 초라하지만, 입문기라는 것을 핑계 삼아 무한한 용기를 내어본다. 일관된 주제도 없고, 통일된 형식도 없지만, 그저 ‘입문자의 호기심’을 주제로 너그럽게 봐 주면 좋겠다.
(1) Summaron 35mm f/2.8
(2) Summicron 50mm f/2.0 4th
(3) Carl Zeiss Jena Sonnar 50mm f/1.5
(4) Carl Zeiss Biogon 21mm f/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