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kon S3 Limited Editon Black (2002)

니콘빠도 몰랐던 니콘 RF카메라

 

15년도 넘게 지난 옛 기억이다. 남대문 어느 카메라 수리점에 선배 한명과 함께 들렀던 날이었다. 수리할 카메라를 맡겨두고 잠시 기다리며 이것저것 구경하다 벽에 붙은 니콘 카메라 계보도(?)가 눈에 띄었다. 당시 나는 F3HP를, 선배는 F2AS를 쓰면서 니콘 수동 플래그쉽 모델을 쓴다는 부질없는 자부심에 으쓱거리며 니콘은 그래도 좀 ‘빠삭’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는데 거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처음보는 니콘 RF카메라들이 있었다.

 

 

171

좌측 맨 위에 있는 니콘 RF 카메라들에게 시선을 뺐겼었다.

 

 

‘야 저건 뭐지? 겁나 이쁘네.’

‘니콘에도 레인지파인더 카메라가 있었네요?’

레인지파인더 카메라라면 당연 라이카였지만 학생 신분에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가격이라 감히 사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던 때였다. 당연히 RF카메라에 대한 관심 자체가 크지 않았기에 니콘에서도 그런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리가 없었다. 당시 스마트폰이 있길 했나 언제 만들어졌고 어떤 성능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궁금증을 해소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카메라 답게’ 생긴 그 멋진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그렇게 눈을 못떼며 한참을 바라보다 수리점을 나오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요즘도 저런게 나오면 사고 싶다.’

 

 

 

 

 

그런데 그게 ‘요즘도 나오는’ 카메라였을 줄이야!

 

그 날 보았던 멋진 니콘 RF 카메라들은 50년대에 생산된 니콘의 S시리즈였다.

자이스이콘의 콘탁스를 다분히 참고하고 카피한 니콘은 S2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콘탁스를 따돌리기 시작한다. S2는 시원시원한 등배파인더에 50미리 프레임 라인을 지원했으며 와인딩 레버 및 리와인딩 크랭크 등을 적용하며 한결 현대적인 RF카메라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1957년에는 시차보정이 되는 6개 화각(28/35mm, 50/85/105/135mm)의 프레임을 지원하는 유니버셜 뷰파인더를 탑재한 S시리즈 끝판왕 SP를 출시하며 세상을 놀라게 한다.

 

 

S3-and-SP

Nikon SP(上) & S3(下)

 

그리고 이듬해에는 복잡한 SP의 파인더를 간략화한 S3를 출시하기에 이르는데 35/50/105mm 프레임 라인이 등배 파인더에 모두 표시되는 방식으로 시차보정 기능도 생략된 모델이었다. 3개의 화각이 상시 표시되다 보니 파인더 내부가 다소 복잡하기는 하지만 28mm, 35mm 렌즈를 사용할 때 오른쪽 파인더에서 초점을 맞추고 왼쪽의 28/35 파인더로 눈을 옮겨야하는 SP에 비해 편리한 측면도 있고 가격도 보다 저렴해,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모델이었다. 바로 그 S3가 2000년 밀레니엄을 맞아 복각 생산 되었던 것이니, 그야말로 요즘도 나오는 카메라였던 것이다.

 

 

 

 

 

니콘의 낭만적인 프로젝트

 

90년대 초반부터 올드 모델 복각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가 니콘에서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에 가장 열의를 보인 곳은 Nikomat, F3, F4, FM2, FM3a 등 수동모델들의 생산을 주로 담당했던 미토 니콘(Mito Nikon)이었다. 1994년 봄, 미토 니콘은 진지하게 S시리즈 복각 프로젝트를 검토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번째 모델로 1958년에 생산된 Nikon S3가 잠정적으로 선정되게 된다. 저속/고속셔터가 분리되어 있고 50미리 프레임만 지원하는 S2는 다소 구식이었을테고 복잡한 유니버셜 뷰파인더를 가진 SP는 꽤 부담스러웠으리라. S3가 선정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토 니콘은 우선 S3 설계 도면을 입수하여 면밀한 검토를 시작하게 되는데 제대로된 복각 생산을 위해서는 새로운 제작 설비와 도구를 갖추는 등 많은 선행 투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는 당연히 생산 단가를 상승하게 하는 요인이었고 아무리 한정판이라고 하더라도 납득이 갈만한 수준에서 가격을 책정하는데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미토 니콘이 주저하고 있을 때, 마침 경기는 불황으로 접어들었고 1995년, S3 복각 프로젝트는 잠정 중단된다.

 

 

 

 

 

다시 시작된 프로젝트

 

3년이 지난 1998년, 미토 니콘은 다시 한번 S3 복각 프로젝트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최초 검토 당시에 추정되었던 높은 생산 단가는 각개의 부품들을 다시 검토하고 생산 공정을 개선하면 상당 수준 낮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이는 상업적 성공 가능성도 높아짐을 의미했다. 미토 니콘은 Nikon Photo Products Inc.(現 Nikon Imaging Japan Inc.) 측에 S3 복각 프로젝트의 매력과 의미를 강력하게 어필했고 결국 Nikon, Mito Nikon, Nikon Photo Products Inc., Tochigi Nikon 까지 총 4개사가 참여한 ‘S팀’이 구성되었다. 그렇게 야심찬 S3 복각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닻을 올리게 된다. 98년 12월이었다.

 

 

 

 

 

모든 것을 오리지널과 동일하게

 

S팀은 복각될 S3의 모든 부품과 품질 수준을 40년전 당시와 동일하게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S3에 들어가는 부품의 수는 816개에 이르렀고 이를 완벽히 재현하는데는 엄청난 정성이 필요했다. 40년전의 도면을 면밀히 재해석하는 한편 역설계를 위해 중고샵에서 S3를 구입해 와 철저히 분석했다. 프레스 및 다이 캐스팅 설비까지 생산 시설을 새로 설계해야 했고 나사 모양, 표면의 질감, ​​페인트의 색상과 광택, 각인 두께와 깊이, 셔터 스피드 다이얼의 글자 색, 인조 가죽의 느낌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심지어 오리지널 S3의 상판 각인의 깊이 0.5mm를 맞추기 위해 이미 공급된 상판 중 절반 가량을 폐기하기까지 할 정도로 S팀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제작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여러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특히 콘탁스와 니콘 바디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바디 오른쪽의 포커싱 기어의 재현은 생각보다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미세 피치 기어가 맞물리며 작동되는 복잡한 구조로 인해 마운트 부분 헬리코이드와 정밀하게 연동이 되지 않았고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야 완벽하게 작동되도록 조정될 수 있었다.

니콘내에서 S3 복각 모델은 M200이라는 코드명으로 불렸으며 M은 Mito Nikon을 의미했다. 니콘의 M200 개발 프로젝트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공감하고 있던 협력사들도 수익과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협력사 출신 고령의 엔지니어들 중 소수만이 S3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었고 바디를 감싸고 있는 인조가죽의 샘플이 협력사에 남아있어 이를 바탕으로 동일한 질감을 재현할 수 있었던 점도 행운이었다. 니콘 S3의 복각은 엔지니어들의 공돌이 정신이 똘똘 뭉친 열정과 낭만의 상징이 되었다.

 

 

 

 

 

수작업으로 진행된 조립 공정

 

부품 생산이라는 큰 산을 극복하자 조립 공정이라는 또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옛 도면을 그대로 읽고 이해하여 조립할 수 있는 숙련공은 거의 없었고 체계적인 조립 절차에 대한 자료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미토 니콘은 당시의 조립 방식을 최대한 현대적인 생산 공정에 맞추어 절차화하며 이를 극복해 나갔다. 40년전과 달리 수작업만으로 카메라를 제작해본 숙련공들이 부족했지만 다행히 니콘에 남아있는 숙련공으로부터 관련한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고 6개월간의 교육을 거친 후 니콘 S3는 본격 조립되게 된다. 특히 섬세함이 요구되는 셔터막 조립은 여성 숙련공들이 전담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 생산은 하루 한 대에 불과할 정도로 더디게 진행됐다. 거기다 부품 공급 지연 등 몇가지 이유로 제품 출하는 예정보다 2개월이나 지연되기도 했다. S3의 생산 속도는 같은 시기 생산되던 FM3a에 비해 6~10배 가까이 느렸지만 지속적인 노력 끝에 애초 목표였던 월 300대 생산을 초과하여 500대까지 생산이 가능케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세상에 다시 태어난 Nikon S3 Year 2000 Limited Edition (2000~2001)

 

니콘이기에 가능했던 이 멋진 프로젝트에 매니아들의 지지는 열렬했고 2000년 4월 6일부터 6월 30일까지 진행된 사전 예약에 504,000엔이라는 엄청난 가격에도 불구 수천명의 예약자가 몰리는 대성공을 기록했다. 완성된 S3는 ‘Nikon S3 Year 2000 Limited Edition’이란 이름으로 그해 10월부터 구매자들에게 인도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2001년 10월까지 8천대의 S3가 생산되었다. 모두 실버 크롬 버전이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열정적인 엔지니어들은 물론, 카메라를 보지도 못했음에도 기꺼이 예약했던 매니아들 모두에게 잊기 힘든 추억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IMG_9018

L형님이 소장하고 계신 Nikon S3 Year 2000 Limited Edition

 

 

 

 

Nikon S3 Limited Edition Black (2002)

 

그리고 2년후인 2002년, S3 블랙 페인트 버전이 새롭게 출시됐다. 블랙 페인트 카메라에 대한 매니아들의 사랑은 유별난데, 실버 크롬에 비해 도장 처리과정이 복잡한 탓에 S3는 5만엔 가량이 더 비싼 556,500엔에 판매 되었다. 생산대수도 훨씬 적어 실버 크롬 버전의 1/4 수준인 2,000대만이 생산되었다.

 

 

DSCF3683

멋진 자태의 Nikon S3 Limited Edition Black (2002)

 

 

Nikon S3 Olympic Model(?)과의 관계

 

NIKONOL3

Nikon S3 Black Paint (1965)

 

구글이나 이베이를 검색하다 보면 1964년 도쿄 올림픽 모델이라고 하는 S3 오리지널 블랙페인트 모델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니콘 공식 홈페이지에는 올림픽 기념으로 S3를 발매했다는 얘기가 없다. 정작 올림픽을 앞두고 재생산 된 모델은 SP였는데,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앞두고 프레스와 잡지사 쪽을 중심으로한 재발매 요구에 응하여 S3가 아닌 SP를 한정 재생산되었던 것이다. (1959년 니콘은 SLR에 집중하기 위해 S시리즈 생산 중단을 결정했다) 그리고 SP 재생산과 함께 사이즈가 더 커진 개선형 Nikkor-S 50mm f1.4가 출시된다. 그렇다면 올림픽 버전 S3의 정확한 정체는 무엇일까. 니콘 홈페이지에서는 1965년에 블랙 페인트 버전 S3가 생산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NIKON S3 재발매

쇼와 40년(1965년)의 니콘 S3 재발매를 알리는 신문기사

 

1965년 9월, 니콘은 S3 블랙 페인트 모델을 2,000대 한정으로 재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올림픽을 앞두고 출시됐던 개선형 Nikkor-S 50mm f1.4가 세트로 구성됐다. 구글에서는 이른바 올림픽 S3의 출시시기가 1962년부터 64년까지 다양하게 검색되는데 결론적으로 니콘 홈페이지의 내용과 위 신문기사가 일치하는 1965년이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올림픽과 비슷했던 생산시기, 올림픽 버전 50미리의 구성, 그리고 한정판, 거기에 프레스용 이미지가 느껴지는 블랙페인트 모델이라는 점 등으로 인해 올림픽 버전이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엄밀히 말해 오리지널 S3 블랙페인트 모델을 올림픽 버전이라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어쨌든 올림픽이 끝난 후에 생산되었기 때문에 올림픽에서 사용될 프레스용이라 보기는 어려웠으며 이미 대세는 SLR이었기에 필드에서 험하게 사용될 기회도 적었다. 덕분에 상당수의 블랙 페인트 모델들은 콜렉터들의 손에 들어갔고 지금도 아주 상태가 양호한 것들을 이베이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이는 Nikon S시리즈의 마지막 생산이었고 37년이 흐른 2002년, S3 복각 블랙페인트 모델은 65년 당시와 같은 2,000대만이 생산되게 된다.

 

 

 

 

 

Nikon S3 Limited Edition Black 박스를 열어 보자

 

니콘 S3 복각 모델은 공식적으로 일본 내수 시장에서만 판매되었다. 실버 크롬 8천대, 블랙 페인트 2천대로 1만대나 생산되었으니 한정판치고는 생산량이 제법 많았던지라 적지 않은 물량이 알음알음 전 세계 매니아들 손으로 퍼져 나갔고 현재도 가격을 지불할 능력만 있다면 이베이에서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다. 국내에도 모르긴 몰라도 S3 복각판이 제법 들어와 있을텐데 국내 블로그에서는 관련된 내용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실버 크롬 버전은 가뭄에 콩 나듯 몇몇 포스팅을 찾을 수 있었으나 블랙 페인트 버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실제 유저들이 찍은 사진과 소감을 보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여튼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을테니 박스 개봉샷을 보기로 하자.

 

 

DSCF3582

겉으로 봐선 별로 특별함이 느껴지진 않는 니콘 특유의 황금색 박스. ‘NIKON S3 LIMITED EDITION BLACK’이라고 적혀 있다.

 

 

 

 

DSCF3583.jpg

상자를 열면 두개의 상자가 자리잡고 있다. 왼쪽에는 카메라, 오른쪽에는 전용 가죽 케이스가 들어 있다.

 

 

 

 

DSCF3584

상자를 꺼내고…

 

 

 

 

DSCF3585

카메라 쪽 상자를 여니 상자가 안에 또 있다. 실버 크롬 버전은 흰 바탕이었던 것에 반해 블랙 페인트 버전은 검정색이 바탕을 차지하고 있다.

 

 

 

 

DSCF3587

뚜껑을 열면 짠 하고 나올 줄 알았더니 또 다시 흰 상자가 있다.

 

 

 

 

DSCF3588

흰 상자를 열자 드디어 블랙 페인트 니콘 S3의 모습이 나타났다. 니콘에서 보기 어려운 고급스러운 패키지라 다소 낯설긴 하지만 역시나 한정판다운 느낌이다. Nikkor-S 50mm f1.4가 마운트되어 있고 전용 후드가 함께 들어있다.

 

 

 

 

DSCF3589

오리지널의 렌즈캡은 플라스틱이었지만 복각 모델엔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다. 니콘 S3 복각의 의미 중 하나는 오리지널에 비해 퇴보된 부분없이 작은 부분이나마 개선하려고 했던 노력이 보인다는 점이다. 단, 아쉽게도 뒷캡과 43mm UV필터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DSCF3594

렌즈캡을 열었더니 황홀한 코팅색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렌즈는 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생산되었던 개선형 Nikkor-S 50mm f1.4와 같은 모양으로 40년전의 광학 설계에 현대적인 멀티 코팅이 더해진 독특한 케이스가 되었다. 슬라이드 필름을 넣고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DSCF3595

뒷면엔 아무것도 없이 밋밋하다. 바디를 감싸고 있는 인조가죽은 협력사에 샘플이 남아 있어 오리지널과 같은 느낌으로 재현할 수 있었다. M4 이전 라이카 바디들은 요즘은 생산되지 않는 볼커나이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동일한 재료로 수리할 수 없는 것과 달리 무척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DSCF3597

뒷판을 열어봤더니 셔터막 위에 보호종이가 딱! ㄷㄷ 왠지 건드리면 안될거 같고 사용하면 안될거 같은 압박감이 엄습해온다. 문득 대학교 사진동아리 때 일화가 떠오른다. 한해 선배였던 누나가 신입생이었던 시절, 집에 안쓰는 카메라가 있더라며 동아리방에 달랑달랑 들고 갔었는데 그게 무려 니콘 F3HP였다고 한다. 너무나도 깨끗한 상태에 선배들이 놀라 ‘와 이런게 집에 그냥 있었다고? 완전 새거 같은데?!’ 하면서 뒷판을 열었는데 저 종이가 셔터막 위에 곱게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야, 이거 진짜로 새건데?!!’ 놀라운 광경이었으리라. ㄷㄷ

 

 

 

DSCF3598

어쨌든 그 놀라운 종이를 치우면 이렇게 셔터막이 보인다. S3, SP 오리지널 모델의 셔터막은 천 재질의 초기형과 티타늄 재질의 후기형으로 나뉘는데 복각 모델은 모두 초기형과 같은 천 재질로 되어있다. 셔터 작동의 부드러움과 정숙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잘 조정된 라이카 M3만큼은 아니지만 여러 유저들이 호평할만하다.

 

 

 

 

DSCF3600

바디를 살펴 봤으니 전용 케이스를 꺼내 봤다. 니콘 글씨 역시 옛 폰트를 따르고 있다.

 

 

 

 

DSCF3601

두툼한 가죽에 굵은 실밥, 다소 투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무척 튼튼해 보인다. 귀한 녀석이니 옷을 입혀서 곱게 데리고 다녀야 할 것 같다.

 

 

 

 

DSCF3603

카메라를 꺼내 후드까지 끼워봤다. 라이카가 아름답다면 니콘은 역시 멋지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DSCF3605

세부적으로 살펴보다 보면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다. 내 것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렌즈의 레터링이 지워진 것이 제법 보인다. 수십년된 독일제 렌즈들, 아니 같은 일제 렌즈들에서도 그리 쉬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한정판으로 만들어진, 그것도 15년 밖에(?) 안된 렌즈에서 이런 헛점을 발견하니 다소 허탈하다. 니콘의 S3, SP 복각 프로젝트는 진짜 공업 예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칭송 해주려다가 여기서 김이 좀 샜다. -_-

 

 

 

 

DSCF3609

그러는 한편 스트랩 고리 위에는 보호 테잎을 꼼꼼히 붙여주었다. (이런건 내가 해도 된다 -_-)

 

 

 

 

DSCF3629

마지막으로 종이 쪼가리들. S3와 SP 복각 모델은 공식적으로 일본 내수용으로만 발매되었기 때문에 매뉴얼도 일본어만 적혀 있다. 뭐 굳이 읽어볼 것도 없는 내용들이지만.

 

 

 

 

s3-manual-1

매뉴얼도 오리지널과 같은 디자인으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오리지널 S3와의 비교

 

 

DSCF3615

마침 내게 지인의 오리지널 S3가 와있는지라 복각 모델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1. 시리얼넘버 형식

 

DSCF3610

오리지널은 63으로 시작하며 복각은 시리얼넘버 앞에 S3라는 모델명이 붙는다. 2000년의 실버크롬 버전은 S3 20XXXX, 2002년의 블랙페인트 버전은 S3 30XXXX로 구분된다.

 

 

 

2. 와인딩 레버의 형태

 

DSCF3611.jpg

와인딩 레버의 형태도 조금 다른데 복각은 끝단의 경계면이 직각에 가깝게 떨어지는 반면, 오리지널의 완만한 경사를 보인다. 이거야 뭐 별로 안중요한데..

 

 

 

DSCF3612.jpg

복각은 꽉 차있는 통쇠고 오리지널은 프레스로 찍어낸 속이 빈 형태임을 알 수 있다. SP, S3 후기형의 경우는 복각 모델처럼 통쇠의 형태로 개선됐다고 하는데 정확히 확인은 못해봤다. 어쨌든 오리지널의 저 텅빈 와인딩 레버는 대리석 타일이 붙지 않은 건물의 뒷면을 보는 듯한 실망스런 느낌이다. 다행히 복각 모델은 이를 개선해두었다. 물론 그렇다고 복각 모델의 와인딩 레버가 월등히 좋은 조작감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가득찬 쪽이 좋아 보인다.

형태의 문제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니콘 RF 모델들에게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바로 이 와인딩 레버인데, 바디 자체는 튼튼하고 남성적인 기계적 느낌이 물씬 나는데 반해 와인딩 레버는 유독 연약해 보이기 그지 없다. 바디에 비해 좀 작지 않나 느껴지는 외관상의 불균형은 둘째로 하고 상하의 유격이 있어 까딱까딱 움직이는데 이 같은 허술한 만듦새는 라이카 M3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부분이다.

 

 

 

3. 하판 부분

 

DSCF3613

오리지널의 하판, 감도 표시 다이얼의 기준이 ASA로 되어 있고 빨간색과 흰색으로 레터링이 되어 있다.

 

 

DSCF3614.jpg

복각모델은 감도 표시 다이얼의 기준이 ISO로 바뀌어져 있고 오리지널 모델엔 없는 MADE IN JAPAN 각인이 추가되어 있다. 단, 1965년의 S3 블랙 페인트모델에는 동일한 제조국 각인이 있다.

 

 

 

4. 그 외

 

렌즈 마운트 부에 거리 단위가 ft에서 m로 바뀌었다. (S3 후기형에는 m단위로 표기된 모델들도 있다.) 필름 카운터에 함께 있는 필름 컷수 셀렉터가 20컷/36컷에서 24컷/36컷으로 바뀌었고 스트랩 고리의 재질이 니켈 도금된 황동에서 크롬 도금 스테인레스로 바뀌었다. 결론적으로 봤을 때 복각 S3는 사소한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오리지날의 그것을 아주 충실히 재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농이냐 필드냐

 

개봉기용 사진을 찍고 S3는 다시 박스 속으로 고이 들어가 책장 높은 곳으로 올려졌다. 카메라는 물론 사진을 찍으라고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애초에 S3 복각 모델을 구입한 사람들 중에 진짜로 이걸로 사진을 찍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 같다. 필름 한번 못 물려보고 10여년 째 장농 속에서 박제처럼 지내고 있는 복각 한정판들이 적지 않을터인데 나 역시도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이것이 과연 후손에게 물려줘야할 니콘 역사 속 빛나는 작품인지(놔두면 비싸지려나..흠흠) 아니면 실사용으로 열심히 써주는게 가장 멋진 것인지 결정이 쉽지는 않다. 발매 당시 공식 예약가에 비해 상당히 저렴해진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투자자(?)들에게 그리 쏠쏠한 재미를 주진 못한 것 같고, 니콘의 추억과 열정에 대해 기꺼이 값을 지불한 애호가들에게 뿌듯한 행복을 안겨준 카메라가 아닌가 싶다.

어쨌든 깨끗할 때 증명사진은 남겨둬야 할 것 같아서…

 

 

 

DSCF3681

 

 

 

 

DSCF3691

 

 

 

 

DSCF3692

 

 

 

 

DSCF3696

 

 

 

 

DSCF3698

 

 

 

 

DSCF3699

 

 

 

 

DSCF3700

 

 

 

 

DSCF3702

 

 

 

 

 

 

 

 

 

섬진강 이야기

하늘에 매화꽃이 날렸다.

‘응? 바람도 안부는데?’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눈이었다.

‘3월에 눈이라니…’

잔뜩 찌푸린 하늘 탓에 매화가 싱그럽게 담기지 않을 것 같아 불만이던 차에 눈까지 내리다니. 아무래도 날씨 좋았던 지난 주에 왔어야 했다는 후회가 다시 밀려온다. 남자는 삼각대를 접었다.

다압면에서 섬진교를 건너 다시 하동읍으로 돌아온 남자는 눈을 피해 터미널로 들어왔다. 이 날씨에 어디를 가나. 그냥 서울로 올라가야 하나. 몇개 적혀져 있지도 않은 행선지 시간표를 바라보던 중 마침 화개행 버스가 들어오길래 남자는 이내 올라탔다. 뿌옇게 김이 서린 차창을 손을 문질러 달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막막한 마음을 달래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새학기가 시작됐고 학교는 활기가 넘쳤지만 남자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1학년에서 2학년이 되는 동기끼리의 신인전 전시회가 막 끝난 후였다. 남자는 최종 프린트를 담당하게 된 3명의 작화 위원 중 한명이었고 저녁 때 암실에 들어가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 반나절 동안 기절하는 생활을 몇주간 해왔던 터였다. 전시회 후 이어진 임원진 선거에서 남자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간발의 차로 낙선하고 말았다. 암실을 관리하고 후배들 기술 지도를 맡는 기술부장 자리를 남자는 몹시 하고 싶어했고 그럴만한 충분한 실력이 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종이 한장 차이도 나지 않을 그 어설픈 실력만이 전부가 아님을 남자는 선거가 끝나고야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잠시 쉬고 싶었다. 어제밤 청량리발 마지막 무궁화호에 오르자 마자 남자는 핸드폰의 전원을 꺼두었다.

화개장터 앞에서 남자는 버스에서 내렸다. 평일 아침, 눈까지 내리는 궂은 날, 섬진강 동편의 19번 국도에는 돌아다니는 차조차 거의 없었다. 딱히 어디로 가야할지 떠오르진 않았지만 남자는 텅빈 도로의 중앙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남자의 어깨 위에 소복히 쌓여만 갔다. 거짓말처럼 온통 하얗게 변한 섬진강 일대에 오로지 남자만이 있는 것 같았다. 얇은 외투가 눈에 젖으며 남자는 추위를 느꼈다.

전시회는 막을 내렸고 임원진 선거는 이미 결론이 났지만 남자는 사실 하나를 더 결정해야 했다.

J는 애초에 동아리에서 그리 열심히 활동하던 회원은 아니었다. 그런 J가 신인전 준비에는 열정을 쏟기 시작했고 암실 순번을 먼저 맡으려고 첫 차로 학교로 오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새벽부터 동아리방에 도착해 전기 난로를 쬐며 암실이 비길 기다리던 J와 암실에서 나온 남자는 자주 마주쳤고 퀭한 눈으로 동아리방 쇼파에 쓰러지는 남자를 J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보곤 했다.

전시회 기간동안 닷징, 버닝 따위를 알려주거나 프린트의 톤을 봐주기도 하며 남자는 J와 조금 가까워졌다. 사실 남자에겐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 활동이 별로 없었던 J와는 그런 것이 거의 처음이었다. 남자는 약간 떨리는 듯한 J의 목소리가 귀엽다고 생각했고, 암실에 먼저 들어가려고 캄캄한 새벽에 첫차를 타고 학교로 오는 J의 모습을 보며 야무진 면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 익숙하지 않은 화장이었지만 파우더를 칠한 뽀얀 볼이 싱그러웠다.

왼편에 화개나루라고 써진 작은 간판이 보였다. 미끄러운 눈길을 따라 조심스레 내려가자 줄을 잡고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있었다. 강 건너 광양 사람들이 화개장에 나올 때 이용하는 작은 나루였다. 소복히 눈이 쌓인 강건너의 모습은 오히려 솜이불을 덮은 듯 따뜻하고 또 아련했다. 눈 덮인 섬진강을 남자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눈에 젖지 않기 위해 가방에 넣어두었던 카메라를 다시 꺼내어 들었다. 며칠전 농구를 하다 넘어져 다친 손바닥에 카메라가 닿자 찌릿했다. 생각보다 살이 깊이 패인 상처는 잘 아물지 않아 진물이 계속 나오고 있어 카메라를 잡기가 꽤 불편했다. 눈 덮인 섬진강과 강너머를 바라보며 세로로 두 컷을 찍었다. 제대로 파지가 되지 않아 약간 흔들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픈 손으로 차가운 삼각대를 펴기 싫었던 남자는 미련없이 나루를 떠났다.

꺼두었던 핸드폰은 주머니 속에서 묵직한 무게감으로 자꾸만 존재를 알렸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전원을 켜보았다. 몇시간 동안 수신되지 않고 있던 문자 메시지 몇개가 동시에 쏟아져 들어왔다.

 

 

 

J가 보낸 메시지들이었다.

남자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김용택 – 섬진강 15 (겨울 사랑의 편지)

 

 

 

030300

2001년 3월, 섬진강 화개나루

 

B급 사진 – study를 시작 하며

1. 사진의 기초

2. 노출의 이해

3. 사진 장르

4. 사진 이론

5. 빛의 이해 -1

6. 빛의 이해 -2

7. 이미지후처리

8. 사진을 보는 법

9. 프로젝트 하기

10. 과제 제출 & 비평

스터디를 시작하기로 논의가 오간 후 최종 동의를 하고 1차로 완성한 스터디 진행표입니다.

처음 구상을 하시고 진행을 진두지휘하고 계신
LaFesta 님과 Starless 님 두분께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스터디 강좌를 진행 해주실 분들,
그리고 이 스터디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무슨 다 끝나고 에필로그 적는 것 같은데요,
이제 시작입니다.
바로 지난 일요일 스터디 시작을 위한 예비모임을 했습니다.
1기 총 7분의 회원님들에게 카메라를 빌려드리고 필름 넣는 법부터 이 분들의 궁금점까지 3시간으론 너무 부족했던 하루였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열정적이어서 5개월동안 풀어야 할 얘기를 그자리 에서 다 해버릴 뻔 했습니다.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은 몇몇은 떼놓고 설명 할게 아니라
사실 계속 꾸준히 같이 묶어서 진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 사진이란게 그렇죠.

좋은 분들과 만나 즐겁게 술 한잔(으로 끝나지 않아서 문제지만) 하는
즐거운 모임인 B급사진
하지만 즐겁게 술 한잔만 하기엔 시간이 아깝고
남아도는 에너지가 너무 아까워서 이 에너지를
숙취 해소가 아닌 다른 걸로 풀기 위한 수단으로 스터디에 수락을 했습니다.
업무에 방해가 되면 안되지만 업무와 별개로 이것저것 해 볼 생각에
17년전 학교 처음 입학해서 교수님들 말씀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스무살 제가 있는 것 같아 좋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심장이 뛰고 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는데요,
역시나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심장이 흥분 되고 짜릿해집니다.

내년 5월말에서 6월 초에는 1기 멤버분들과 즐거운 척 하는 가식적인 얼굴로 스터디 마무리 단체사진을 찍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건투를 빕니다.

끝으로 카메라 빌려주신 모든 분들께 레알로 오지게 감사합니다.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모든 컬러 사진은 D5+58mm1.4N
*모든 흑백 사진은 Monochrom

** 보정 1도 안해서 사진 담긴 모든 분들께 Sorry Sorry

별 헤는 밤

별 헤는 밤이면 들려오는 그대의 음성
하얗게 부서지는 꽃가루 되어 그대 꽃위에 앉고 싶어라
밤하늘 보면서 느껴보는 그대의 숨결
두둥실 떠가는 쪽배를 타고 그대 호수에 머물고 싶어라

유재하 – 그대 내 품에 中

 

DAH_0662

살면서 내가 별을 찍을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DAH_0663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카메라 잡은지도 거의 20여년
그런데 유달리 안했던 작업 중 하나가 야경, 그중에서도 별사진 일겁니다.

DAH_0664

그런데 갑자기 별을 담고 싶더군요.
아픔을 잊는 방법중 하나가 무언가에 몰두 하는건데
사진 이란게 내 옆에 있어서 참 다행 이란 생각이 드는 요즘 입니다.

DSC_2907

DSC_2929

DSC_2936

가슴이 아플땐 가끔 밤하늘의 별을 보세요.

Nippon Kogaku의 Topogon : W-Nikkor 2.5cm f4.0

 

거침없이 달리시는 만수동생님 덕분에 관심있던 렌즈를 빌려 써보게 됐다.

54년에 발매된 W-Nikkor 2.5cm f4.0이 그 주인공. 환갑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어마무시한 몸값을 자랑하는 귀한 녀석이다. 원래는 Zeiss Ikon의 Contax와 같은 형태의 니콘 S마운트로 발매되었지만 라이카에서도 사용가능한 M39(LTM) 마운트로도 발매되었다.

 

 

DSCF2484.JPG

Nippon Kogaku W-Nikkor 2.5cm f4.0 (LTM버전)

 

오늘날 기준으로 25mm라는 화각은 다소 낯설긴 하지만 당시로서는 거의 초광각에 해당하는 것이라 사진가들의 환호를 받았으리라. 이 렌즈에 대한 매니아층은 오늘날도 제법 두터운데 그 이유는 우수한 성능도 성능이지만 특이한 구조에 기인한다.

 

NikkorRF25mm4.jpg

보다시피 이 렌즈는 4군 4매 구성된 완벽한 좌우대칭의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같은 극단적인 좌우 대칭 구조를 통해 광각 렌즈에서 왜곡을 비롯한 각종 수차를 물리적으로 억제할 수 있었다. 마치 구슬과도 같은 렌즈 알을 보고 있자면 영롱한 매력에 빠져드는데 이같은 설계의 원조는 사실 Carl Zeiss의 Topogon이었다.

 

 

topogon2.jpg

요것이 오리지날 Carl Zeiss Jena Topogon 25mm. 화각부터 최대개방값까지 똑같다. 50년대 니폰 코가쿠, 캐논 등의 일본 메이커들은 독일 메이커들의 설계를 다분히 참고한 제품들을 출시하는 한편 그들의 성능을 뛰어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뭐 하나라도 개선된 점을 어필하는 것이 중요했던지라 오리지날 Topogon이 거리계와 연동되지 않는 목측식이었던 것에 반해 W-Nikkor 2.5cm는 거리계 연동이 가능하게 출시되었다. (캐논의 25mm f3.5는 최대 개방값도 아주 조금 더 밝아졌다.)

 

 

DSCF2485.JPG

코팅 역시 당대 독일 렌즈들보다 두터워 보이는데 역시나 역광에서 버티는 능력도 제법 준수하다.

 

 

DSCF2486.JPG

Topogon 타입임을 증명하듯 렌즈알이 반구형으로 볼록하게 나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DSCF2482.JPG

뒷면에서는 더욱 그 형태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정말 구슬을 하나 박아넣은 듯한 모양이라 가만히 들여다 보고만 있어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DSCF2487.JPG

다만 Topogon 타입은 급격하게 꺾인 렌즈 끝단의 곡률로 인해 주변부의 화질이 많이 떨어지고 비네팅이 심하게 발생하는 단점을 가지는데 이때문에 최대 개방시에도 조리개는 완전히 다 열리지 않게 설계함으로써 그 문제를 최대한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 위 사진에서도 최대 개방에서 조리개날이 완전히 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렌즈는 비네팅이 제법 발생하며 개방시에는 더욱 심해진다. 반면 오리지날의 위엄은 역시 무시할 수 없는지 칼 자이즈의 Topogon은 조리개가 거의 대부분 열리면서도 W-Nikkor에 비해 비네팅이 적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편이다.

 

 

DSCF2488.JPG

거리계의 단위는 FEET로만 적혀있고 라이카 스크류 렌즈들과 같은 형태의 무한대 잠금 장치를 가지고 있다. 크롬 코팅이나 레터링 각인의 수준은 훌륭하다. 코팅된 렌즈임을 표기해주는 빨간색 “C”마킹도 적당한 시각적 포인트가 되어준다. Carl Zeiss 렌즈들의 “T”마킹을 보는 듯 하다.

 

 

DSCF2494.JPG

필터 구경은 상당히 특이한 34.5mm로 오늘날 해당하는 사이즈의 필터를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중앙카메라 수리실에 제작을 의뢰해 만들었다. 앞으로 애매한 사이즈의 필터는 비싸게 구할 생각하지 말고 애초에 부탁드려 만드는 것이 더 좋을 듯.

 

 

DSCF2495.JPG

얇은 필터링에다가 광택도 최대한 비슷하게 제작되어 제짝인 듯 잘 어울린다.

 

 

DSCF2493.JPG

단단하고 야무진 렌즈에 어울리지 않는 플라스틱이라 좀 깬다만 올드 렌즈에서 일반적인 금속제 슬립온 방식에 비해 훨씬 안정적인 클립온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앞캡.

 

 

DSCF2478.JPG

바디와의 매칭. 슬림한 경통에 짧은 길이의 컴팩트한 렌즈로 바르낙 바디에 제법 잘 어울린다. 25미리 파인더가 없어서 일단 Voigtlander 28mm 파인더로..ㄷ

많은 롤을 찍어보지 못해 렌즈의 특성에 대해 평가를 내리기 조심스럽지만 니콘은 니콘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에는 물론 장단이 존재하는데 흔히 니콘 렌즈의 특성으로 평가받는 높은 선예도와 강한 콘트라스트는 이미 이 시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칼라 색감 역시 화사하고 예쁜 쪽은 아니지만 Topogon타입의 특징에 기인하는 강한 비네팅 효과와 왜곡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쭉쭉 뻗는 시원시원함은 렌즈의 개성을 확실히 드러내준다.

 

 

B/W Neagtive : Kodak 400TX

 

170614 LiecaIIIf nikkor25mm 400TX 03-1

 

 

170614 LiecaIIIf nikkor25mm 400TX 04-1

 

 

170614 LiecaIIIf nikkor25mm 400TX 06-1

 

 

170614 LiecaIIIf nikkor25mm 400TX 11-1

 

 

170614 LiecaIIIf nikkor25mm 400TX 15-1

 

 

170614 LiecaIIIf nikkor25mm 400TX 21-1

 

 

170614 LiecaIIIf nikkor25mm 400TX 22-1

 

 

170614 LiecaIIIf nikkor25mm 400TX 24-1

 

 

170614 LiecaIIIf nikkor25mm 400TX 29-1

 

 

170614 LiecaIIIf nikkor25mm 400TX 30-1

 

 

11

 

 

12

 

 

13

 

 

Positive : Fujifilm RVP 100

 

170615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03-1

 

 

170615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07-1

 

 

170615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15-1

 

 

170617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22-1

 

 

170617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29-1

 

 

170617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33-1

 

 

170617 LeicaIIIf Nikkor 25mm RVP100 35-1

 

 

끝으로 귀한 렌즈 빌려주신 만수동생님과 렌즈 뒷캡으로 IIIf를 보내준 Qunaj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보다 훌륭한 리뷰를 보려면

Qunaj님의 ‘W-NIKKOR C 2.5cm 1:4 LTM

Goliathus님의 ‘[Nikon]W-Nikkor 2.5cm F4

봄이 오는 곳, 섬진강

봄을 맞이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최고로 꼽는 봄 맞이는 매화를 보러 섬진강을 찾는 것이다. 2월부터 피어나기 시작하는 매화는 3월 중순이면 절정에 달하는데 섬진강 서안의 다압면에는 매실농원들이 자리하고 있어 이 시기에 장관을 이룬다. 섬진강의 포근한 풍경과 어우러지는 매화의 모습은 이보다 봄스러운 이미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언제나 설레이는 장면인데 봄에 섬진강을 찾지 못하면 제철음식을 못먹고 지나간 듯 한 해가 아쉽다.

아침 7시경 출근하듯이 집을 나서 경남 하동을 향해 달렸다. 18만 키로가 다되어가는 내 똥차 96년식 아반테는 이틀전 엔진오일을 간 덕인지 오늘따라 제법 잘 달려준다. 밟으면 밟는대로 죽죽 나가는 평소답지 않은 놀라운 엔진파워를 보여주며 3시간여의 질주 끝에 하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nikon 397

학교 다닐 땐 차가 없으니 청량리역에서 여수행 무궁화호 마지막 밤기차를 타고 하동으로 내려왔었다. 새벽에 하동역에 내리면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어둑어둑했는데 그 시간에는 다니는 차도 없고 택시를 타는 것은 사치였으니 그저 건강한 두 다리로 열심히 걸어서 섬진강가 하동 송림까지 가곤 했다. 아무도 없는 모래밭에 서서 동녘이 밝아오는 것을 기다리며 차가운 강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있던 내 모습을 지금 생각하니 웬 청승인가 싶기도 하다만 그렇게 벌벌 떨며 섬진강의 일출을 찍고는 저 다리를 건너 광양 다압면 매화마을까지 걸어가곤 했다.

.

.

nikon 399

섬진강의 재첩을 건지는 아저씨. 이른 아침, 카메라를 주렁주렁 들고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의 인사도 반갑게 받아주시며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다. 매화꽃은 아직 좀 이르다며 다음주 정도는 되어야 절정에 이를 것이라는 말에 광양으로 건너가기에 앞서 약간 걱정이 든다. 재첩 요리는 재첩국 밖에 떠오르지 않아 다르게 먹는 방법은 없냐고 여쭈었더니 숙회로도 먹는다고 하셨는데 아직 먹어보진 못해 사뭇 궁금해진다. 섬진강에 들르면 꼭 맛보아야할 음식이 재첩국이다. 미각을 자극하는 전세계의 온갖 화려한 음식들이 흔해진 오늘날, 특별한 양념도 없이 재첩만을 넣고 끓인 국이 뭐 그렇게 엄청난 맛을 자랑하겠냐만 그래도  그 뽀얀 국물 한 숟갈을 입에 넣으면 섬진강과 봄의 향기가 온 몸에 퍼져오는 듯 하다.

.

.

nikon 401

섬진강 어민회의 낡은 컨테이너 건물. 섬진강은 아직도 그 맑은 수질이 유지되고 있는 몇 안되는 강 중 하나로서 재첩을 비롯하여 향긋한 수박향이 난다는 은어, 수질이 조금만 오염되어도 적응하지 못하는 민물참게가 잡힌다. 참게는 군사지역이라 보호받는 임진강 외에는 섬진강에서만 잡히는데 마침 군복무했던 부대가 임진강과 가까워 참게 매운탕은 종종 맛볼 수 있었다. 이번 여행길은 혼자라 양이 많은 매운탕은 먹기 뭐해 역시 재첩국을 먹으려다 참게장 정식을 시키면 재첩국도 따라 나온다기에 그리 했다. 꽃게장에 비해 살이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적지만 향긋하고 깊은 맛이 썩 괜찮았다. 이 모든 섬진강의 혜택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맑은 수질이 유지되기를 바래본다.

.

.

nikon 402-1

섬진강변 둑에 피어난 매화. 아직 좀 이른 시기라 흐드러지게 핀 상태는 아니었지만 접사를 즐긴다면 꽃잎이 싱싱한 이 시기가 더 제격일 듯 하다.

.

.

nikon 407-1

다리를 건너자 넓은 부지에 매화축제를 알리는 애드벌룬과 행사장 천막들이 눈에 띄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늘 찾던 그곳으로 향했다. 평일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관광객들이 거의 없어 조용해서 좋았다. 풍경 속에 녹아든 어느 노부부만이 매화를 카메라에 담는데 열중이셨다. 연세가 제법 되어 보였는데도 DSLR을 사용하시는 것이 대단해 보여 인사를 드리며 잠시 얘기를 나눴다. 30년이 다되어 가는 내 롤라이플렉스를 보시며 요즘도 이런 카메라를 쓸 수 있냐 물으시기에 DSLR도 쓰실 정도로 저보다도 더 신세대이신 것 같다고 하니 우리야 잘 못찍으니 디지털을 쓴다며 쑥스러워 하셨다. 섬진강의 봄과 썩 잘 어울리는 두 분이셨다.

.

.

nikon 406

봄은 봄이다. 매화가 점점히 피어나는 섬진강변의 마을에서 모종을 심고 밭을 손질하는 일손이 바쁘다.

.

.

nikon 408

난 카메라에 담고 이 분은 캔버스에 담는 중. 파레트에 짜놓은 물감의 색채가 발랄하다.

.

.

nikon 410

섬진강의 맑고 잔잔한 물, 깨끗한 백사장. 섬진강을 찾으면 언제나 마음이 포근해진다. 섬진강이 배출한 文人 김용택의 책을 가져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섬진강 15를 이 곳에서 읽는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

.

.

섬진강 15  -겨울, 사랑의 편지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 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

.

nikon 411.jpg

2008.03.10. 섬진강

일본철도여행

20150814-_DSC12561

일본(日本)의 서남쪽 끝에서 동북쪽 끝까지 가는 길이다보니, 시작점은 큐슈(九州)였습니다. 후쿠오카 (福岡)가 일반적이겠지만, 티켓팅을 하다가 사가(佐賀)로 결정했습니다. 굳이 복잡한 하카타(博多)를 헤맬 생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가는 가본적이 없지만, 어감이 맘에 들었습니다. 아마도 어느 책에선가 봤을 수도 있겠구요.

20150814-_DSC12660

사가공항(佐贺空港)은 아담했는데, 한국인 대상 프로모션이 한창인지 여기저기 한국어가 보였습니다. 별다른 볼거리는 없는 것 같아 숙소가 있는 사가역까지 가는 버스티켓을 사러 갔습니다. 한국어를 잘하는 티켓부스 직원이 한국어로 설명해줬습니다. 3명이면, 한 사람은 편도, 두 사람은 왕복 티켓으로 끊어서 둘이 쓰면 됩니다. 그 편이 저렴해요. 감사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20150814-_DSC12661

20150814-_DSC12791

20150814-_DSC12811

20150814-_DSC12871

한 시간 남짓 달려 사가역에 도착했습니다. “현의 북동부는 세후리 산지(脊振山地)가 후쿠오카 현과의 경계를 이루며, 남동부는 후쿠오카 현까지 계속 되는 지쿠시 평야가 대부분을 차지한다(위키백과)”더니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온통 평원이었습니다. 매년 열린다는 열기구 세계대회(http://www.welcome-saga.kr/magazine/detail.do?no=118)를 구경하고 싶어졌습니다.

20150814-_DSC12951

숙소에 짐을 던져두고 거리 구경에 나섰습니다. 고작 이틀을 머물다보니 최대한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20150814-_DSC12991

20150814-_DSC13151

20150814-_DSC13051

20150814-_DSC13131

20150814-_DSC13081

사가의 중심가는 그리 큰 편은 아니었습니다.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들에서는 예쁜 불빛이 흘러나오고, 백년 넘게 영업중이라는 과자점도 눈에 띄었습니다만, 화려한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찬찬히 하나하나 눈에 넣으며 거리를 걷다 시간이 멈춘듯한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20150814-_DSC13211

좁은 골목에서, 연인일지도 모를 젊은이들의 모습을 좇았습니다. 어느 가게를 갈까, 즐거운 표정으로 걸어가는 모습에서 묘한 멜랑콜리를 느꼈습니다.

20150814-_DSC13241

마음이 끌리는 가게가 몇 군데인가 있었지만, 처음 눈에 들어온 포장마차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어쩐지 좋은 곳 같아보였습니다.

20150814-_DSC13271

20150814-_DSC13460

20150814-_DSC13463

맥주와 함께 내주는 적당한 안주로 저녁을 해결했습니다. 일본답게 생맥주가 맛있었습니다. 특산이라는 임연수 구이도 꽤 훌륭했습니다.

20150814-_DSC13651

낯설게 떠있는 등을 바라보며 숙소로 향했습니다.

20150814-_DSC13981

초저녁과는 다른 분위기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바랜 불빛이 스며나오던 재즈바와 몇 개인가의 노포를 지나치다보니 익숙한 거리를 걷는듯한 기시감도 느껴졌습니다. 이대로는 잠들기 어렵겠구나, 근처의 맥주집을 찾아갔습니다.

20150814-_DSC14031

20150814-_DSC14071

20150814-_DSC13901

왁자지껄하면서도 어딘지 차분한 분위기를 즐기다 숙소로 향했습니다.

20150815-_DSC14380

20150815-_DSC14381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거리로 산책에 나섰습니다. 사가는 물의 도시라로까지는 할 수 없지만, 옛 사가성을 중심으로 조성된 해자와 운하들이 독특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운하의 지류에서는 갓파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20150815-_DSC14281

20150815-_DSC14301

20150815-_DSC14341

어제의 포장마차도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20150815-_DSC14611

우편국의 빨간 차량들

20150815-_DSC14231

20150815-_DSC14641

현청과 의회의 풍경입니다. 고요한 풍경 사이로, 해자에 떨어지는 반영을 한참 좇았습니다.

20150815-_DSC14681

20150815-_DSC14701

20150815-_DSC14731

반영에 홀려 걷다 고개를 들어보니, 길 맞은 편에 만두집이 있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을 쳐다보니 허기가 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손님들이 제법 보였습니다.

20150815-_DSC14811

20150815-_DSC14851

20150815-_DSC14881

20150815-_DSC15011

현립도서관과 공원을 걷고 반대편 해자쪽으로 향했습니다.

20150815-_DSC15021

몇 백살은 되었을 것 같은 나무들을 지나치다 돌아보니, 해자에 만들어둔 오리 대피소가 보였습니다. 뭐라고 생각하면 좋을까 잠깐 고민이 되었습니다.

20150815-_DSC15111

20150815-_DSC15201

20150815-_DSC15151-3

해자를 따라 걷다가, 길의 끝에서 고요한 마을의 풍경을 만났습니다. 어쩐지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20150815-_DSC15191

20150815-_DSC15311

다시 오래된 나무의 풍경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20150815-_DSC15531

숙소로 돌아와 사가를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JR패스를 확인하고 오늘 타야 할 기차표도 챙겼습니다. 사가를 출발해 하카타, 오카야마(岡山)를 거쳐 시코쿠(四国)의 오즈(大洲)까지 가는 750km의 여정입니다. 오전에 출발해 밤에야 도착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짐을 챙겨 사가역으로 향했습니다.

20150815-_DSC15681

20150815-_DSC15591

20150815-_DSC15691

어딘지 군용열차를 연상시키는 신칸센(新幹線) 미도리(みどり)에 올랐습니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인데, 신칸센이라 하더라도 등급이 있고, 생김새도 서로 달랐습니다. 단지 색이 다른게 아니라, 아예 다른 기차라는게 신기했습니다.

20150815-_DSC15781

창밖으로 스쳐가는 플랫폼의 풍경을 보며 후쿠오카로 향했습니다.

… to be Contined

 

2003년 경동시장

2003년 가을의 어느 날.

후배 몇몇과 함께 청량리 경동시장을 찾아 촬영을 하고 있었다.

어느 골목길을 지나다 길바닥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계신 노숙자 분들을 마주쳤다. 허락을 득하고 사진을 찍어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쉽지 않을 것 같아 포기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함께 갔던 여자 후배 한 명이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아저씨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라고 여쭙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느닷없는 제안이 통했던 것인가 ‘아 그래 찍어라.’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겁 없는’ 후배의 용기도 놀라웠지만 사진을 찍으라는 그 분의 말씀에 귀를 의심했다.

‘아니 뭘 이런걸 찍어. 아 찍지 말고 그냥 가요!’

‘아냐아냐! 우리나라엔 아직도 우리같이 힘든 사람들이 많아. 이런 모습도 찍어서 세상에 알려야지. 찍어. 괜찮아.’

일행들 몇분이 반대했지만 괜찮다고 찍으라고 하시는 아저씨 덕분에 쭈뼛쭈뼛 카메라를 들고 몇 컷을 누르기 시작했다. 동전 가득 푼 돈이 모여 이렇게 함께 막걸리를 마시는 중이라 하시던 노숙자 아저씨들은 우리가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도 해주시고 우리의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각자의 고향과 과거 ‘잘나갔던 시절’ 얘기를 하며 잠시나마 즐거워 하셨지만 가족들의 얘기를 할 때면 고개를 숙이고 어깨가 쳐지곤 했다. 우리도 아예 바닥에 앉아 그렇게 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씩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쉽지 않은 경험이라 제법 가슴이 콩닥이는 순간이었다. 보통의 경우 이런 촬영은 상호간의 축적된 오랜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길 가다 불쑥 드린 당황스런 부탁인데도 학생들이니 찍어도 좋다며 허락해주신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이 XX들 여기서 뭣하는거야!’

갑자기 등 뒤에서 험한 말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나타난 다른 노숙자분이 우리에게 욕을 하며 다가오고 계셨다. 후배들이 놀라며 카메라를 빼고 물러났다.

‘니들은 뭔데 여기서 사진을 함부로 찍고 그래! 뭐하는 놈들이야!’

‘아 내가 찍으라고 했어. 냅둬.’

‘냅두긴 뭘 냅둬. 야 너네들 어디서 나왔어. 허락없이 사진을 막 찍어도 돼?’

당장이라도 카메라를 던져버릴 듯한 기세로 아저씨가 달려들자 사진을 찍으라고 허락하셨던 아저씨께서 일어나 말려 주셨지만 겁에 질린 후배들은 연신 죄송하다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손을 저으며 얼른 가라고 하셨지만 무작정 자리를 피해 이 상황을 모면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해서는 안될 짓을 하다 쫓겨나는 모양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얼어붙은 후배들을 보내고 혼자 남았다.

여전히 화가 나 계신 그 분께 오해를 풀 수 있게 얘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나의 이런 태도가 다소 황당하셨는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고 하셨다. 담배가 필요할 것 같아 주머니를 뒤져보니 갖고 있는 현금이 정말로 2천원 뿐이었다. 바로 옆 슈퍼에서 디스 한 갑을 겨우 사서 나와 아저씨께 한 개비를 권해드리고 나도 고개를 돌려 불을 붙였다. 얘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을 찍으려면 좋은 곳도 많은데 그런데 가서 찍을 일이지 왜 굳이 이런 곳에서 노숙자들을 찍어? 여기 사람들 십원 짜리, 백원 짜리 모아다가 몇천원 되면 겨우 이렇게 막걸리나 몇 병 사서 나눠 마셔. 그러다가 취하면 아무데나 누워서 잠들고. 그렇게 살아. 하루하루. 이런 거 찍어다 어디다 쓸거요?’

‘아름다운 장면을 아름답게만 찍는 것은 제겐 별로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세상엔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몰라주는 부분, 어두운 부분. 이런 곳에도 관심이 필요하구요 그 관심을 일으키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사진 찍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게 하루 이틀일인가. ‘

‘네.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더 심각한 것 아닐까요. 저는 세상이 달라지는데 사진으로라도 뭔가 기여를 하고 싶어요. 언젠가 저도 나이들고 용기가 없어지면 이런 사진은 못찍고 예쁜 꽃이나 멋진 풍경 사진을 찍고 다닐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직 젊은데 벌써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조금은 더 의미있는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저씨들 사진을 찍었습니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접근한 것이거나 몰래 찍으려 한 건 아닙니다.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한 오해는 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나를 나무라시던 아저씨는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셨다. 그렇게 길바닥에 앉아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눈 후에 우리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연락처가 궁금하시다는 아저씨께 핸드폰 번호를 적어드리며 다음엔 여기서 막걸리라도 같이 한잔 하시자고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

.

.

030924 TMY 03_36 F90X-1

.

.

030924 TMY 06_36 F90X-1

.

.

030924 TMY 07_36 F90X-1

.

.

그렇지만 사실 사진 한 장으로 무었을 할 수 있었겠는가. 사회의 현실을 사진으로 알리고 싶다고 그 분께 얘기하며 공감을 이끌어낸 것은 순전히 나의 가식적인 말발 덕뿐이었다. 피사체로서의 호기심에 이끌려 셔터를 누른 후 그럴싸한 언변으로 포장한 것일 뿐 내가 이 사진으로 뭔가를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 22세에 불과했던 철없던 나의 오만함으로 가득찬 ‘설교’가 통했음에 으쓱하며 ‘나 이렇게 진지하게 사진을 합니다. 예쁜 감성 사진이나 찍는 사람들과는 달라요~’ 라며 자부했던 허영심과 과시욕이 전부였다.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다. 14년전 그 때와 달리 지금은 이 사진들을 마주 보기가 어렵다.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많은 감정들이 날카롭게 내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진 삶을 누리고 있다지만 마음 씀씀이는 더욱 각박해졌고 여전히 우리 사회의 안정망은 취약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자칫 발을 헛딛으면 다시 올라올 수 없을 골짜기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아 두렵다. ‘불쌍한 남의 일’이라기 여겼던 저 분들의 모습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는 요즘이다.

.

.

030924 TMY 04_36 F90X-1

사진 속 오른쪽 앞에 앉아 계신 아저씨가 일행 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진을 찍으라며 허락해주신 분이다. 당신인들 당신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카메라에 찍히고 싶으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니 내 기꺼이 찍혀 주겠다시던 그 말씀이 너무나 감사하다.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계신지도 알 수 없지만 카메라를 바라보는 그 분의 눈빛에서 세상을 향한 오기가 보여 다행이다. 보다 좋은 환경에서 잘 지내고 계시길 바래본다.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아저씨께서 내게 이렇게 물어봤을 때 나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래, 자네 잘 살고 있는가. 자네가 하고 싶다던 그런 사진도 잘 찍고 있나?’

2003.09.24 서울

Nikon F90X / ai-s 28mm f2.8 / Kodak TMY / IVED

버스 지붕을 아시나요?

학교 다닐 무렵 첫 학기가 지나가고 여름 방학을 기다리던 어느날 동기 녀석이 그러더군요
“인도 가지 않을래?”
저의 답변은 단호 했습니다.
“싫어”
그 당시 책 또는 작은 정보로만 접하던 인도 라는 곳은 그냥 덥고 낡고 먼지 날릴거 같은 그런 느낌
더운곳은 더더구나 싫어 하는 저로썬 거길 굳이 돈내고 내 첫 베낭여행으로 간다는게 탐탁치 않았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몇년 지나고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에 M이라는 아이의 사진첩에 인도사진이 폭풍처럼 올라오고 마음이 막 흔들렸습니다. 소심한 저로썬 여자 혼자 인도여행을 한거에 매우 놀라웠고 M에게 물었습니다.
“인도 안위험해?”
M이 답하더군요
“한국에서 여자 혼자 여행 하는것보단 덜 위험하던데요?”

그리고 2년 후 2005년 5월 저는 M에게 이끌려 인도를 갔습니다.
첫 외국, 그리고 홀로 떨어진 상황 가뜩이나 소심 했던 저에게 인도는 그냥 그런 여행지가 되어 가고 있을때 였습니다. 마음에 맞는 여행자들끼리 만나 전부 6명, 각자 일행들과 나가리 되서 일명 나가리 패밀리 라고 부르며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같이 처음에 이동했던 라다크
밤하늘에 가득찬 수많은 별들과 차가운 공기 따가운 햇살 즐거운 사람들 ,처음 낯설었던 느낌은 사라지고 이젠 인도가 내집 처럼 편해질 무렵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뭔가 허전하다’

그리고 우리 여섯명의 여행이 서로가 끝을 향해 달려갈 즈음 Leh에서 시작되어 라마유르 그리고 사스풀에서 완전 관광모드로 돌입한 우리가 다시 Leh로 돌아갈때 어쩔수 없이 로컬 버스라는걸 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 돈이 없는건 아니라서 돈좀 내더라도 편하게 지프나 이런걸 타고 다녔죠) 첫 출발지도 아니여서 로컬버스안으로 탁 들어왔을때 들었던 생각은
‘아..이건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 짐들 그리고 더위….잠시 고민을 하다가 남자 4 여자 2로 이뤄진 우리들은 결정을 했습니다.
“여자들은 안에 타고 남자들은 그냥 위로 올라가자”
당시 버스 지붕위를 즐기던 이스라엘 여행자들을 보며 돌+아이 쯤으로 바라보던 제가 먼저 제안을 한거죠. (결국 여자 멤버들도 나중에 지붕으로 올라오게 되죠)

img226

광활한 라다크의 사막풍경

img227

사막에서 반바지 나시…이런 패션 매우 위험 합니다.
저날 저녁 다리와 어깨에 감자 붙히고 아주 난리도 아니였죠

img233

라다크의 풍경은 광활한 사막
그리고 중간 중간 녹지가 어울린 참 독특한 느낌 입니다

img236

img239

흔한 로컬 휴게소의 모습

img241

휴게소에서 만난 아이
티셔츠가 Be the Reds 붉은악마였습니다.
의외로 이동네에 한국 조기축구회 옷이나 이런 폐옷들이 많이 넘어간거 같더라구요.

img242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본 놀라운 풍경
오토바이가 힘들어 보였는지 버스 지붕위로 올리더라구요.역시 인도에서 불가능은 없구나..

img243img244

다같이 올려 지붕위로 보냅니다. 이렇게 사람과 오토바이가 다정하게 버스 지붕위로 올라 가게 됩니다.

img245

지옥의 인도 로컬 버스
3명 2명 이렇게 탑니다.
한국의 카운티 마을버스가 넓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img250

다시 Leh로 향해 달려갑니다.
이번엔 지붕 동무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img260

길가다 만나면 이렇게 서로 손도 흔들어 줍니다.

img267

도로에서 작업 하는 사람들
거의다 맨손으로 돌을 깨서 이렇게 작업들을 합니다.
사막의 따가운 햇살속에서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합니다

img268

그럼에도 이렇게 외국인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를 보여줍니다.
저는 이걸 정말 여유라고 생각 합니다.
반대의 상황에서 한국에서 이랬다면? 백인들이 버스 지붕 타고 실실 웃으며 카메라 들이대고 손 흔들면 한국사람들은 손 흔들까요?

img269

고단해 보여도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

img273

2005년의 인도여행
그곳에서 버스 지붕으로 소소한 일탈을 시작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작은 변화가 지속적으로 이어진거 같습니다. 여유가 있는 그들을 보며 그게 하도 많은 외국인 여행자를 상대해서 생긴 내성이나 능글맞음 일수도 있지만 난 왜 그렇게 빡빡하게 예민하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별거 아닌 나비효과 일수도 있지만, 작은 시도조차 안해보는것 보단 범법행위가 아니라면 소소하고 작은 일탈부터 평소 안하던 것부터 해보면 삶의 즐거움은 소소하지가 않은거 같습니다.
그때 제가 평소처럼 그냥 참고 버스 안에서 의자라는 안락함을 포기 하지 않았더라면?
12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 나는 여행이 아니라 이미 잊혀진 하나의 기억으로 남았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겨울에 지인들과 여행을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얘기가
“입수할까?” 입니다.
점잖게 여유있게 풍족하게 하는 여행도 좋지만
가끔은 나이도 체면도 내려놓고 남들한테 피해 안주고 눈쌀 찌푸리는거 아니면 한번쯤 해보세요
그때는 좀 민망하고 낯뜨거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때의 추억이 더욱 즐겁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귀찮고 피곤하고 웃느라 정신 없어도 꼭 사진은 남기세요

All Photo by Nikon F100 + AF20-35 , TMX

DasFoto

어느 여름 날

f1050034

문득 신영복 선생이 그리웠다. 당신께서 훌쩍 떠나신지 1년이 넘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서 펼친 부분이 <청구회 추억> 이었다. 선생의 젊은 시절 한 대목이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명문이다. 재소자용 휴지(일명 똥종이)에 깨알 같이 썼다. 죽음을 앞에 둔 청년이 이토록 아름다움 글을 남긴 까닭이야 없겠는가 만은 그 깊은 곳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청구회 추억은 1966년 봄부터 선생께서 구속되기까지 2년 여 시간동안 여남은 살 까까머리 아이들과의 추억을 29장의 똥종이에 기록한 것이다. 선생께서 출소 후 집안을 정리하다가 찾아내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수감 중이실 때 방을 급하게 옮기면서 한 헌병에게 부탁해서 집으로 보내달라고 했다고 하는데 다행히 곱게 집으로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우리는 큰 감동을 선물 받게 되었다.

서오릉 소풍 길에 만난 아이들과의 인연을 매달 이어오다가 선생의 느닷없는 구속으로 아이들과의 만남도 끝이 나고 말았다.

‘1966년 이른 봄철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해후하였던 나와 이 꼬마들의 가난한 이야기는 나의 급작스런 구속으로 말미암아 더욱 쓸쓸한 이야기로 잊혀지고 말 것인지…….’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글은 이렇게 맺어지고 있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 더불어 숲 홈페이지( http://www.shinyoungbok.pe.kr )에 가시면 전편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

f1050035

어느 여름 한 나절!
내 아이는 언니 오빠들과 섞여 놀았다.
처가 동네 아이들이다.
대처에 살다 부모를 따라 들어 온 모양이었다.
한참 뒤 이 사진들을 뽑아다가 전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이들은 이사 갔다.

.

f1050031

.

.

f1050029

.

.

f1050027

.

.

f1030013

.

.

f1030002

.

.

f1050030

.

.

f1030012

.

.

f1030011

.

.

f1030003

.

.

f1030001

2003. 8 / 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