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매화꽃이 날렸다.
‘응? 바람도 안부는데?’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눈이었다.
‘3월에 눈이라니…’
잔뜩 찌푸린 하늘 탓에 매화가 싱그럽게 담기지 않을 것 같아 불만이던 차에 눈까지 내리다니. 아무래도 날씨 좋았던 지난 주에 왔어야 했다는 후회가 다시 밀려온다. 남자는 삼각대를 접었다.
다압면에서 섬진교를 건너 다시 하동읍으로 돌아온 남자는 눈을 피해 터미널로 들어왔다. 이 날씨에 어디를 가나. 그냥 서울로 올라가야 하나. 몇개 적혀져 있지도 않은 행선지 시간표를 바라보던 중 마침 화개행 버스가 들어오길래 남자는 이내 올라탔다. 뿌옇게 김이 서린 차창을 손을 문질러 달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막막한 마음을 달래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새학기가 시작됐고 학교는 활기가 넘쳤지만 남자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1학년에서 2학년이 되는 동기끼리의 신인전 전시회가 막 끝난 후였다. 남자는 최종 프린트를 담당하게 된 3명의 작화 위원 중 한명이었고 저녁 때 암실에 들어가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 반나절 동안 기절하는 생활을 몇주간 해왔던 터였다. 전시회 후 이어진 임원진 선거에서 남자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간발의 차로 낙선하고 말았다. 암실을 관리하고 후배들 기술 지도를 맡는 기술부장 자리를 남자는 몹시 하고 싶어했고 그럴만한 충분한 실력이 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종이 한장 차이도 나지 않을 그 어설픈 실력만이 전부가 아님을 남자는 선거가 끝나고야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잠시 쉬고 싶었다. 어제밤 청량리발 마지막 무궁화호에 오르자 마자 남자는 핸드폰의 전원을 꺼두었다.
화개장터 앞에서 남자는 버스에서 내렸다. 평일 아침, 눈까지 내리는 궂은 날, 섬진강 동편의 19번 국도에는 돌아다니는 차조차 거의 없었다. 딱히 어디로 가야할지 떠오르진 않았지만 남자는 텅빈 도로의 중앙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남자의 어깨 위에 소복히 쌓여만 갔다. 거짓말처럼 온통 하얗게 변한 섬진강 일대에 오로지 남자만이 있는 것 같았다. 얇은 외투가 눈에 젖으며 남자는 추위를 느꼈다.
전시회는 막을 내렸고 임원진 선거는 이미 결론이 났지만 남자는 사실 하나를 더 결정해야 했다.
J는 애초에 동아리에서 그리 열심히 활동하던 회원은 아니었다. 그런 J가 신인전 준비에는 열정을 쏟기 시작했고 암실 순번을 먼저 맡으려고 첫 차로 학교로 오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새벽부터 동아리방에 도착해 전기 난로를 쬐며 암실이 비길 기다리던 J와 암실에서 나온 남자는 자주 마주쳤고 퀭한 눈으로 동아리방 쇼파에 쓰러지는 남자를 J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보곤 했다.
전시회 기간동안 닷징, 버닝 따위를 알려주거나 프린트의 톤을 봐주기도 하며 남자는 J와 조금 가까워졌다. 사실 남자에겐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 활동이 별로 없었던 J와는 그런 것이 거의 처음이었다. 남자는 약간 떨리는 듯한 J의 목소리가 귀엽다고 생각했고, 암실에 먼저 들어가려고 캄캄한 새벽에 첫차를 타고 학교로 오는 J의 모습을 보며 야무진 면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 익숙하지 않은 화장이었지만 파우더를 칠한 뽀얀 볼이 싱그러웠다.
왼편에 화개나루라고 써진 작은 간판이 보였다. 미끄러운 눈길을 따라 조심스레 내려가자 줄을 잡고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있었다. 강 건너 광양 사람들이 화개장에 나올 때 이용하는 작은 나루였다. 소복히 눈이 쌓인 강건너의 모습은 오히려 솜이불을 덮은 듯 따뜻하고 또 아련했다. 눈 덮인 섬진강을 남자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눈에 젖지 않기 위해 가방에 넣어두었던 카메라를 다시 꺼내어 들었다. 며칠전 농구를 하다 넘어져 다친 손바닥에 카메라가 닿자 찌릿했다. 생각보다 살이 깊이 패인 상처는 잘 아물지 않아 진물이 계속 나오고 있어 카메라를 잡기가 꽤 불편했다. 눈 덮인 섬진강과 강너머를 바라보며 세로로 두 컷을 찍었다. 제대로 파지가 되지 않아 약간 흔들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픈 손으로 차가운 삼각대를 펴기 싫었던 남자는 미련없이 나루를 떠났다.
꺼두었던 핸드폰은 주머니 속에서 묵직한 무게감으로 자꾸만 존재를 알렸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전원을 켜보았다. 몇시간 동안 수신되지 않고 있던 문자 메시지 몇개가 동시에 쏟아져 들어왔다.
J가 보낸 메시지들이었다.
남자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김용택 – 섬진강 15 (겨울 사랑의 편지)
2001년 3월, 섬진강 화개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