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LLEI 35 SE

나에게 필름 카메라는 M6 하나로 차고 넘치기에 다른 카메라 따위 눈 하나 팔지 않았다. 다른 카메라의 부류에는 지인이 쓰던 롤라이35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작지만 다부진 체구에 오밀조밀 이쁘장하게 생긴 색다른 매력의 카메라는 당시 내게 일말의 동요도 일으키지 못했다. 한창 라이카와 사랑에 빠진 탓이리라.

밀월은 달콤하나 짧을 수 밖에 없는 운명, 라이카시스템은 수려하면서도 충분히 실용적이었지만 필부의 일상을 함께하기엔 그 잘난 몸값이 늘 걸리적거렸다. 앞만 보고 달리던 경주마의 눈가리개가 벗겨진 듯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 마침 이 곳 비급매거진에 “Minolta TC-1 Review”라는 천민수님의 필름카메라 리뷰가 포스팅되었다. 화사한 샴페인색으로 화장한 조막만한 얼굴에 G-Rokkor 28mm f3.5 렌즈는 컬러와 흑백을 넘나들며 발군의 성능을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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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은듯 신이 난 나는 곧장 이런 덧글을 남겼다.

“흑백도 좋지만 쬐그마한 녀석이 뽑아주는 컬러에 마음이 빼앗겨버렸습니다. 손에 들린 도구에 따라 찍는 이의 마음가짐도 변하기 마련인지라 엠육의 엄숙함을 이런 녀석이 벗겨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네요. 꼭 한번 써보고 싶은 장비리스트에 올려둡니다.”

나는 곧장 미놀타 TC-1, 콘탁스 T3 같은 애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간 귓등으로 듣던 얘네들 몸값이었는데 중고 거래가를 직접 확인해보니 진짜 장난없다. 특히 T3는 몇몇 셀레브리티들이 소장하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치솟아 M6랑 몸값으로 비등비등하다. 모시고 다니려 찾는 카메라가 아닌데..라는 생각에 고민의 실타래는 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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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땅에 내쳐진 씨앗일지라도 적절한 수분과 볕이 주어지면 싹이 트는 법인가.

지름에 고민하는 어둠의 다크에서 문득 송도 바닷가에서 지인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카메라, 롤라이 35가 운명처럼 생각났다. 시세 확인을 위해 당장 장터로 향했다. 싱가폴/독일, 실버/블랙, 35/35S/35TE 등 언뜻 봐도 그 종류가 방대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필름똑딱이들에 비하면 대체로 부담없는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노출계와 구도확인용 파인더가 장착되어 있고 노출은 100% 소유주에게 종속적인 매뉴얼 설정방식이다.

1966년 첫 생산을 시작한 롤라이35는 당시 35mm 범용필름을 장착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카메라였다. 하지만, 자이스社의 Tessar렌즈와 1/500초를 지원하는 Compur셔터 그리고 고센社의 CdS미터를 사용하는 등 성능은 결코 작은 카메라가 아니었다. 다만, 렌즈 촛점거리는 롤라이35라는 이름과 달리 40mm였고 목측식 초점방식이라는 점이 다소 걸림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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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학습은 여기까지로 하고 설계자로 불리는 지인의 영도를 받기로 했다. 메신저로 롤라이 35에 대해 문의하자 모니터 너머의 그는 자세를 고쳐앉더니 롤라이35의 탄생과 배경부터 실타래처럼 엉겨 복잡해보이던 다양한 롤라이35 시리즈를 꼬치꿰듯 한방에 정리해주는 신기神技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가 덧붙여 보여주는 롤라이35의 결과물은 Summicron에 결코 뒤지지 않는 샤프함과 힘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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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2_35_m6 hp5 9호관사(2) 송도
leica m6, summicron 35mm, ilford h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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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3_22_후지기록용100 롤라이35 오도리 효자동 산책
rollei 35 se, sonnar 2.8/40, fujicolor 100

(라이카는 35mm, 롤라이35는 40mm인 초점거리 차이로 원근감 차이가 있지만, 결과물만 놓고 보면 가격 차이가 무색해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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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카메라라는 지인의 개런티까지 보태어 나의 세컨 카메라는 이미 롤라이35로 결정되었다. 이제 장터링만 남았다.

“제꺼 쓰실래요?”

문득 건네는 그의 말이 놀랍고도 다행스러웠다. 안그래도 판매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멀리 모르는 사람에게 보내느니 가까운데 보내면 좋겠다라는 그의 말. 혹시라도 쓰다가 팔 생각이면 자기에게 팔아달라는 조건과 함께 나는 운명처럼 영혼 충만한 그의 롤라이35SE를 분양 받아냈다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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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ei 35SE 모델은 1979년에서 1981년 싱가폴에서 15만대가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모델은 롤라이35S 기반에 CdS 노출계 대신 전자식 노출계가 장착돼있어 뷰파인더에서 LED 불빛으로 노출 과부족을 확인 가능하다. 렌즈셔터는 벌브~1/500초를 지원하고 Sonnar 2.8/40 렌즈는 f2.8~22, 감도는 25~1600까지 세팅할 수 있다. 특히 조리개 설정시 다이얼 하단에 Lock버튼이 없는 모델이므로 뷰파인더에서 노출을 확인하면서 조리개 다이얼을 손가락 감각만으로 조정할 수 있어 더욱 실용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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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장비는 언제나 새로운 열정까지 패키징되어 온다. 요 며칠 40년 된 카메라로 출퇴근길, 동네 산책을 함께 했다. 손목스트랩을 걸고 손바닥으로 감싸면 손아귀에 폭 안기는 컴팩트한 카메라지만 335g의 무게감이 그리 만만치 만은 않다. 일포드 hp5+ 1롤과 후지필름 기록용필름 100 2롤을 사용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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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롤라이35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사용소감을 적어보면,

(그닥 많은 카메라를 섭렵해보지 못한 처지라, 주된 비교대상은 롤라이에게 ‘에브리데이-캐리-카메라’ 자리를 잠시 내어 준 라이카 엠육이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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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엠육은 셔터를 장전해야 노출계가 동작하는 반면 롤라이35는 미장전 상태에서도 반셔터로 노출 확인이 가능해 편리하며, 카메라 내장노출계는 외장노출계 값과 비교해봐도 상당히 정확한 수치를 제시해 줌

둘째, 목측식이라 초점에 대해 걱정했으나 풍경 혹은 사물 위주의 스냅일 경우 “피사체와의 거리추정-초점값 세팅-노출확인-조리개/셔터속도 조정-프레이밍-촬영”등의 순서로 차근차근 진행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음. 다만, “프레이밍-초점세팅-노출확인/조정”이 동시에 가능한 라이카시스템에 비해서는 촬영이 두, 세호흡 느릴 수 밖에 없어 순발력이 필요한 스냅에는 활용이 제한적일 것으로 판단됨

셋째, 35mm도 아니고 50mm도 아닌 어정쩡한 40mm 초점거리에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싶었으나, 몇 롤 찍어본 소감으로는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그래서 너무 들어갈 필요도 물러날 필요도 없는 균형감 있는 초점거리인듯 함. (35mm와 달리) 인물을 중심으로 (50mm와 달리) 주변 풍경을 살짝 녹여넣을 수 있어 가족 나들이에 적합해 보이기도 함

넷째, 셔터와인딩과 셔터릴리즈의 감각은 라이카의 그것과 비교할만한 것은 아님(가격도 그러하니 뭐). 라이카의 조작감에 대해 흔히 얘기하는 “Silky smooth’가 이런거였구나를 새삼 깨닫게 됨. 그렇다고 롤라이 만듦새가 토이 수준이거나 그런 것 아니니 오해가 없길 바라며, 조작감 측면은 라이카가 월등해서 생기는 차이일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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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라이35는 이른바 ‘찍는 재미’가 있는 카메라다. 손목에 걸고서 가벼운 마음 가벼운 발걸음에 스치는 풍경 목측으로 어림잡아 담아내야 만 카메라. 초점이 맞는지 맞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그런게 중요하지 않은 카메라.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한 믿음 그리고 현재를 즐기는 것이란 걸 일깨워 주는 카메라가 바로 롤라이35라는 생각이 든다.

기껏 한달 써보고 끄적이는 글이라 나중에 이불킥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사용 초반의 경험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자기최면을 걸며 롤라이35 입문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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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EI 35 SE with “Ilford HP5+ Black and white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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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EI 35 SE with “Fujifilm 記錄用 100 Color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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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ei 35SE : BW vs Co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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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대학

JR 삿포로역에서 북으로 10여분 걸으면 북해도 유일의 종합대학 홋카이도대 캠퍼스를 만날 수 있다. 교직원으로 밥벌이하는 탓에 여행을 가서도 직업적, 사진적 호기심 범벅으로 그 지역 주변의 학교를 둘러보는 편인데, 운 좋게도 우리 숙소가 지척이라 이른 아침시간을 빌어 살짝 다녀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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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대학의 남문, 정문과 불과 50여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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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중심에 한적하고 너른 캠퍼스는 삿포로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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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이후, 본격적인 근대화의 행로에서 북해도는 본토의 시각에서 볼 때 일종의 아메리카 대륙과도 같았으리라. 비옥한 토지와 동해의 풍부한 수산자원은 철저히 개척되어야 할 대상이었을테고, 이를 착실하게 수행하기 위한 기술개발과 인력양성의 수요는 당시 북해도 개발의 거점도시였던 삿포로시에 대한 대학 설립의 명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을 업고 홋카이도 대학은 학생 24명으로 1876년 삿포로농학교[札幌農學校]로 문을 열었다. 이후 20세기에 접어들어 도호쿠 제국대학과 홋카이도 제국대학 농과대학을 거쳐 패망 직후인 1947년 종합대학으로서 편제를 갖춘 채  홋카이도 대학으로 교명을 변경 후 학생수 15,000명에 달하는 현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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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대학의 기원이었던 농과대학 건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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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초기의 모습을 잘 간직한 농대건물 인근에는 “Boys, be ambitious”로 유명한 윌리엄 클라크 박사의 동상이 있다. 그는 메사추세츠 농업대학 재임시절 삿포로농학교 초대 부학장으로 1년간 부임해 설립 초기 학교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하는데, 특히 삿포로를 떠나며 남긴 “소년이여, 야망을”이라는 명언은 당시 일본 젊은이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말은 아마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한일강제합방과 대동아공영권 주장 그리고 2차 세계대전까지, 어쩌면 일본 젊은이들에게 빗나간 야망마저 끈질기게 추구하게 만든 하나의 불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클라크 박사 턱밑에 새겨진 그의 말 한 마디가 고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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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클라크 박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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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년을 자랑하는 역사 덕에 캠퍼스 곳곳에 산재된 나무들은 저마다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대학본관을 중심으로 캠퍼스의 남과 북을 잇는 메인도로는 커다란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있어 가을이면 노랑 단풍으로 채색되어 이 일대는 보나마나 장관일 듯하다. 나는 곧장 본관건물을 돌아 은행나무길과 함께 홋카이도 대학의 또 다른 명소인 포플러 애비뉴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넉넉히 걷기 좋은 폭의 길 양쪽으로 웅장한 포플러 나무들이 사열해 있는 곳이다. 초록초록 싱그러울 포플러길을 상상해보니 이 곳 역시 연인들의 성지일 것임에 분명하다. 이른 아침, 세상 하얀 눈길을 걷고 있는 나 역시 갓 스물 연인에게 뒤지지 않을 이 행복감을 기억회로에 촘촘히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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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 다소 볼품없어 뵈는 포플러 애비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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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 가도 양옆으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쌓인 눈 위로 삐죽 튀어나온 철재 지지대들로 미뤄보아 연구용 작물을 재배하는 농과대학 소속의 실습농장인듯 하다. 여기 눈 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새하얀 여백은 소매가 짧아지는 속도에 맞춰 진한 초록으로 채색되어갈 것이다. 1936년 세계 최초로 인공설을 만드는 데 성공한 이 대학 물리학과 교수 나카타니 우키치로(1900~62)는 ‘눈은 하늘에서 보낸 편지’라는 말을 남겼는데, 연구실 창문너머 설경을 감상하던 그에게 하늘이 보내는 편지는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한 사랑의 메세지였음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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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그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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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를 조금 넘긴 시각, 캠퍼스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그렇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여행자의 엉터리 날짜감각을 정정하며 어제와 다를 것 없을 그들의 일상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내일이면 오늘과 다른 일상의 쳇바퀴로 돌아갈 나 자신에게도 어깨 토닥토닥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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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aken with ilford hp5+

 

prayer for blessing

새벽 알람에 눈을 떴다. 5시 40분..

아늑한 이불 품을 떠나기 아쉬워 잠시 웅크렸지만, 새해 일출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일찍 일어나려고 전날 종각 타종장면만 본 후에 바로 잠자리에 들었기에 그다지 피곤하지 않다.

내 기척에 새벽 잠 설칠까 살그머니 침실을 나왔는데 창 밖 풍경은 아직도 한밤이다. 예보에 다르면 아침해는 1시간 반 뒤에나 뜰 것이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이 시간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괜찮은 곳에 주차하고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추운 아침을 녹일 커피도 보온병에 담은 후 목적지인 왕룡사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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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적한 새벽도로 풍경에 라디오 단추를 눌렀다. 새벽에 잘 어울리는 차분한 목소리의 라디오 진행자. 그가 말하길 세상에는 세 가지 기다리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밥상, 둘째는 손님 그리고 마지막은 아침 해란다. 흠.. 마지막 단어는 게으름 피지 말고 성실하게 살라는 뜻이리라. 단 하루지만 새벽부터 부지런 떨었다는 보람에 어깨가 으쓱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룡사로 오르는 산길에 접어든다. 나보다 더 부지런한 이들의 차량으로 앞쪽은 이미 붉은 행렬을 이루고 있다. 이 곳 왕룡사는 절 입구까지 차량으로 접근할 수 있어 편리한데 반해 주차공간이 열악해 멋 모르고 진입하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하는데 일찍 나선 덕분에 적당한 자리에 주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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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icron 35mm, ilford delta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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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 커피 홀짝이며 기다리니 건너편 산등성이 너머가 자몽색 여명이 채워진다. 옷 매무새를 여민 후 곧장 대웅전으로 향했다. 신발은 가지런히 벗은 후 옆문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나는 참배용 방석을 깔고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며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아미타불께서 지극히 이기적인 현세의 욕심을 들어주실리 만무하겠으나 떡국보시 값 내는 셈 치고 복전함에 종이돈도 한 장 밀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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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icron 35mm, ilford delta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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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을 나와 거대한 돌부처가 형산강을 굽어보는 일출 명당으로 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해를 기다린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흡사 추위를 피하기 위해 무리지은 펭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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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icron 35mm, ilford delta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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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오늘 이 시간 이곳을 찾은 십중팔구의 사람들은 나처럼 헛된 욕심 버리고 이타(利他)하여 함께 성불하라는 여래의 가르침과는 지극히 배치되는 개인의 영달과 무병장수 같은 사사로운 서원(誓願)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욕심과 어리석음은 곧 괴로움의 근본원인이니 번뇌를 극복하고 열반하자고 설파하셨던 부처님으로서는 어처구니 없으실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쩌랴. 당장의 삶이 질퍽하고 고단한 우리는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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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icron 35mm, ilford delta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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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순리는 어김이 없어 예정된 시각에 어제와 같은 해가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어제와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사진을 찍거나 복을 기원한다. 나 역시 그들 틈에서 한 해의 복을 빌었지만 이번 기도는 부처님을 향한 것도 아니고 새해의 기운에 기댄 것도 아니었다. 나의 기도는 성실한 삶을 살자는 자신에 대한 다짐이자 당부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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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icron 35mm, ilford delta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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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icron 35mm, ilford delta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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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icron 35mm, ilford delta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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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직장이 비교적 가까워 궂은 날씨만 아니면 걸어서 출퇴근한다. 걸으면 평소 보지 못하고 휙휙 지나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인데, 회색 콘크리트의 척박한 틈새를 비집고 삐죽 고개를 내민 잡초들의 경이로운 생명력을 목격하는 일도 그 중 하나다. 뿌리 내릴 흙이 한줌이라도 있을까 싶은 의외의 장소에도 그들은 보란 듯 연녹색 이파리를 활짝 피고 있다. 제 발로 자리 잡았을 리 만무하건만 식물은 일말의 불평 없이 주어진 生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침소봉대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발 달리고 자유의지까지 탑재하고 살아간다는데 감사함을 느끼고, 그들을 통해 주어진 삶을 겸허히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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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료한 주말, 가족들과 국립부산과학관으로 향했다. 그냥 집 구석에 있자니 바닥으로만 뒹굴고 코에 바람이라도 좀 넣어줘야 주말을 헛되이 보냈다는 죄책감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도로는 한산했기에 네비게이션 아가씨가 안내해주는 예정시간 그대로 도착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방문이라 와이프와 나는 관람거리들에는 관심이 없던 탓에 아이 손에 티켓 한 장 쥐어주고는 홀로 전시관 안으로 들여보냈다. 열살 소년에게 이런 일은 혼자서도 척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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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않은 자유시간에 나는 과학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계단도 올라보고 한쪽 귀퉁이 구석진 공간으로도 돌아보고.. 하릴없는 걸음 중에 은근히 시선을 잡아끄는 아이들을 만났다.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각자의 자리에 심겨진 녀석들. 볼 앤 체인같은 묵직한 화분에 단단히 속박된 그들은 비현실적으로 하얀 벽을 등진 채 일정 간격으로 사열해 있다. 관심을 두고 바라보니 저마다의 생김과 표정이 재미나다. 나는 졸업사진 촬영하듯 한번에 화분 하나씩 정성껏 찍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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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을 뜻하는 ‘Still life’는 직역하면 ‘정지된 생명’이다. ‘고요한 물건’을 의미하는 ‘정물(靜物)’과 비교할 때 이 얼마나 사진적 표현인가. 카메라의 셔터막이 열리고 닫히는 찰나의 순간, 생명은 정지된 채 이미지로 박제되고 필멸(必滅)은 불멸(不滅)로 영원성을 획득한다는 철학의 사유를 담지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스틸 라이프를 이리 거창하게 정의하고 나니 같이 곁들일 사진들이 급격히 후달림을 느낀다. 뭐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이렇게 어름어름 매거진에 포스팅 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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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학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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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동

추운건 딱 질색이다.

거짓말 안보태고 1년에 한여름 석달 빼고는 그늘에만 들어가도 한기를 느끼는 체질 탓에 나는 겨울이 가장 싫다. 늦가을만 되어도 내복 꺼내입기 시작할 정도니 내 생각에도 추위 참 많이 탄다. 그렇다. 내 사전에 목욕탕 냉수마찰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사진을 좋아하면서부터는 해마다 겨울이되면 의례히 보이는 설경사진들이 어찌나 멋있는지.. 모니터 너머 꿈같은 풍경들을 한번이라도 찍어볼 수 있다면 뽈때기 터질듯한 추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포항은 꽤나 따뜻한 편이다. 서너해 건너 한번씩 폭설이 오기도 하지만 바로 윗동네인 강원도에 비하면야 눈이 귀한 동네다. 설령 운이 좋아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 코튼으로 씌워놓은 마냥 하얀 어느 겨울 아침이라 하더라도 출근을 해야하는 평일인 경우가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설경촬영은 그저 나랑 1도 관계없는 그러니까 눈이랑 친한 동네에 살거나 혹은 삶이 여유로운 이들의 전유물일 뿐이었다.

아랫배가 땡겨 화장실 가려 일어난 어느 겨울 새벽, 창 밖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파리한 빛이 평소의 그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특별한 감각의 정체를 확인하러 창으로 다가가니 이미 세상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오늘이 무슨요일이지? 그렇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이내 방한채비를 단단히 하고 효자동에 내린 간달프의 마법을 카메라에 수집하기 위해 현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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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데다 이른 시각 탓에 도로를 서행하는 차량 몇 대를 제외하고는 인기척이 없다. 동녘에서 고개를 드는 노오란 햇살이 효자동 골목에서는 어느 담 어느 건물이 높고 낮은지 키재기 경연을 벌이고 있다. 익숙하디 익숙한 효자동은 순백의 화장으로 낯설었다. 철길 건너 만물수퍼 앞 비질하는 아저씨 그리고 설경에 신난 동네 똥개를 모델로 대여섯 컷을 눌렀다. 필름 카운터는 어느새 36을 가리켰다. 잘해야 2컷 더 찍을 수 있으리라. 숄더백에 든 여분의 필름에 안심이다.

한창 공사중인 테라스하우스를 올려보며 한 롤을 마저 찍은 후 영일대 호텔 쪽으로 넘어간다. 필름을 교체하기 위해 잠시 멈춰 하판을 열었는데 바디 내부가 눈에 익은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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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순간 등줄기가 찌릿함을 느끼며 신속하게 하판을 다시 닫았다. 다 찍은 필름을 리와인드도 하지 않은 채 오픈해 버린거다. 대체 얼마나 그리고 어디까지 노광된걸까? 한 겨울 눈길 위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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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겠냐. 이 멍청아.

잠시 간의 자책과 함께 필름을 되감은 후 새 필름을 로딩했다. 한 롤 촬영이 마치면 잡생각말고 되감기부터 해 놓는 습관을 들이기로 다짐하하고는 새 마음으로 촬영을 재개했다. 심란한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 위에 어지러이 난 타이어자국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고요한 아침이다. 점점이 뒤뚱뒤뚱 걷는 이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검은 계열의 두터운 겨울 옷을 입은 사람들은 설경 위에서 훌륭한 포인트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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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대 호수의 설경을 두 눈으로 듬뿍 안는다. 얼어붙은 호수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각양의 나무들은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풍경을 선물해주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눈 앞 풍광을 턱없이 부족한 뷰파이더로 잘라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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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간은 8시를 넘어 겨울해가 꽤나 올라섰다.

작은 소녀가 자기 키 만한 빗자루를 들고 눈 쓰는 모습이 귀엽다. 함께 있는 아이 아빠의 허락을 구해 사진을 찍었다. (후에 메모해두었던 메일로 보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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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동에 펼쳐진 마법은 골목소녀를 끝으로 해제되었고 얼마 후 걱정반 포기반의 마음으로 문제적 필름을 현상해보았다. 다행히 결과물은 네거티브의 부처핸섬 관용도 덕에 새까맣게 타지 않은 채 녹지 않는 눈의 마법처럼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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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ca MP / summicron 35mm asph / HP5+ D76 self_dev. / epson4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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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03. ~ 06.

지난 연휴때 홍콩에 다녀왔습니다.
다들 그렇듯이 꼬맹이 위주 가족여행이여서…

첫 날은 기차덕후 아들 원풀어주느라 트램타고 종점까지 가서 되돌아오느라 하루 다 보내고,
둘째 날은 홍콩과학관이랑 홍콩역사박물관에서 체험하느라 꼬박 하루 다보내고,
세째 날은 홍콩디즈니랜드 오픈시간에 들어가 문닫을 때까지 놀다 나왔구요.
마지막 날은 피크트램 탈려고 줄서다가 하루 다 보내고 밤에는 이유없이 스타페리만 몇번을 왕복했는지…

그 바쁜 와중에 잠시 잠깐씩 담은 홍콩스냅입니다.
담에 정말 자유의 몸으로 B급분들이랑 카메라 맘 편하게 메고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은퇴 그리고 귀농

5년 전 아버지께서 정년 퇴임을 하셨다.

30년 이상 중,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교장직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시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은퇴 후 뾰족한 계획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아들 내외가 지내는 포항으로 이사를 오셨고, 손자 보는 재미 그리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 계모임 등으로 한가한 일상을 보내기 시작하셨다.

그런 느슨한 시간으로 1년이 흘렀고, 아버지는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늙으시는 것 같았다. 엄마 말로는 약속 없는 평소에는 10시까지 늦잠을 주무시다가 소파에서 신문이나 티브이를 보시고, 식사 후에 잠시 산책하다 들어오면 다시 티브이를 보거나 누워계신다 하셨다. 살도 많이 찌셨고 검은 머리는 일부러 흰머리를 심으시는 것처럼 급격히 하얗게 변해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보다 에너제틱한 삶을 위해서 수영도 권하고 취미 활동 역시 추천해 드려봤지만, 아버지의 무료한 은퇴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촌에 놀고 있는 밭에다 뭘 좀 심어볼까 고민 중이라며 혹시 ‘아로니아’가 어떨까 하고 물어오셨다. 4년 전인 그때만 해도 ‘아로니아’라는 과일은 생경했었고, 처음 듣는 과일 이름인 탓에 검색해보니 연결된 주요 키워드가 무려 수퍼푸드, 노화 방지, 항암효과, 항산화의 끝판왕 같은 것들이다. 아 이게 뭔가 건강에 굉장히 좋은 건가봉가 했다. 아버지는 농업 관련 서적도 탐독하시고 작물 재배 관련 카페에 가입하시며 아로니아 공부를 묵묵히 해 나가셨고, 이듬해 덜컥 아로니아 묘목을 1000그루 남짓 심기에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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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없이 잘 자랄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잠시, 질 좋은 토지와 햇볕에 바지런한 농부의 땀이 더해지니 땅에 꽂힌 꼬챙이 같던 모종들은 여러 갈래 무성한 덤불로 착실히 성장해 나갔다. 보통은 심은지 3년째는 되어야 제대로 수확한다고 하는데 2년 차였던 작년에 벌써 작지 않은 양을 수확할 만큼 아로니아가 일찍이 자리를 잡아가니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초보 농부인 부모님께서는 내심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로니아 수확 3년 차인 올해엔 농장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좀 찍어두겠노라 결심했다. 무거운 거 들고 나르는데 옆에서 카메라 깔짝거리는 게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소중한 순간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지금 남기지 않으면 후회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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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이른 첫 수확에 이어 올해는 제대로 풍성할 모양이라며 가지마다 촘촘하게 달린 연두색의 설익은 열매를 매만지신다. 못 보던 과수 운반용 전기수레도 어디서 구해오셨다. 3년 차 농부 아버지는 은퇴 직후의 푸석함을 완전히 벗으시고 또래의 누구보다 탄탄하고 여물어 보이신다. 체중도 적당히 유지하시고 매 끼니 밥맛도 좋다 시니 아들 기분이 참 좋다. 자고 일어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가치는 건강한 삶을 담보하는 중요한 전제조건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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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아로니아 생과 수확은 7월부터 8월까지 한 달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데 8월 첫째, 둘째 주가 아주 피크다. 이 기간은 그야말로 온 가족 동원령이 떨어지는 터라 서울 사는 여동생도 내려와야 하고 아이들은 ‘농촌체험 활동’ 삼아 고사리손까지 보탠다. 보통 열사를 피해 새벽같이 일어나 너덧 시간 작업하고 살을 태울듯한 대낮에는 그늘에서 열매를 다듬다가 늦은 오후로 넘어가면 접수된 주문 확인하여 택배를 부치는 일이 반복되는데, 노동의 강도가 장난 없어서 동원인력 중 체력이 가장 좋은 나마저도 며칠 만에 곡소리를 냈다. 노동의 강도가 이렇다 보니 당연히 부모님 체력과 건강이 무척 걱정되던 차에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몇 주 내내 묵묵히 일하시던 엄마한테 대상포진이라는 고통스러운 놈이 와버렸다. 어질어질한 현기증에 몇 번 넘어질 뻔도 하셨는데, 증상이 두통이다 보니 두통약과 진통제 처방으로 며칠 버티셨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도 약이 듣지 않아 종합병원을 가셨는데 알고 보니 달팽이관 신경 쪽으로 발생한 대상포진이라 균형감각에 문제가 있었다. 엄마는 곧장 입원하셨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3~4일 안정을 취하면 나을 정도로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 그리 말씀을 드렸건만.. 병원 첫날에는 끼니도 힘겨워하시던 엄마였지만 링거액과 충분한 잠으로 다행히 금방 기력을 회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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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은 귀향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은퇴 세대의 아내들은 남편 따라 시골로 들어가는 걸 감옥살이 버금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는데 도시가 고향인 엄마는 아버지를 따라 순순히도 촌구석으로 들어가셨고 당신 몸 돌볼 생각도 않은 채 힘든 농사일로 무리까지 하셨다고 생각하니 곁에서 챙기지 않은 아버지가 야속하기도 했다.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버지는 일꾼을 부려 남은 일을 거의 마무리하셨다. 엄마가 입원하는 해프닝까지 겪으며 어렵게 써 내려가는 2017년의 귀농일지.. 하지만 퇴원 후 다시금 건강한 웃음을 되찾으신 어머니와 은퇴 후 퍼석한 삶에 빠지셨던 아버지의 건강한 변신만은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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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깨 너머로 20년 뒤 내 모습을 잠시 그려본다. 나도 아버지의 땅에서 무언가를 심고 있을까? 사진과 나는 어떤 사이일까?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혼자 피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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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쇼지사진미술관

 

일본여행 마지막 날 아침, 숙소를 나선 우리는 요나고로 향했다.

천하태평 완행열차를 탄 덕에 사카이미나토 역에서 요나고 역까지 50분이나 걸렸다. 역 앞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때운 우리는 미리 조사해 둔 버스 시간표에 따라 10시 20분발 다이센 루프버스를 탔다. (하루 10회 운행하며, 봄/여름/가을 시즌제로 운행하므로 미리 운영 여부와 시간 체크) 다이센 루프버스의 주요 코스는 ‘요나고역 – 다이센지 – 다이센목장 – 우에다쇼지미술관 – 모리노쿠니 – 요나고역’으로 다이센산 기슭에 자리한 주요 관광명소를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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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을 출발한 버스는 이내 요나고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접어들었다. 왕복 2차선 시골도로 주변으로 펼쳐진 논과 밭은 8월의 건강한 녹색으로 빛난다. 10분 남짓 더 달렸을까. 어느새 우리는 울창한 숲속으로 진입하였다. 창문을 살짝 열고 울창한 나무와 함께 건강한 호흡을 몇 번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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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도 화창하던 날씨는 환승지점인 다이센지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폭우가 퍼부었다. 버스정류소에 발이 묶인 채 우산이라도 사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비는 차츰 잦아들더니 저 너머 빼꼼히 해까지 보인다. 높은 산 중턱이 부린 변덕이었나 보다.

여행은 다시 시작되고 우리는 다이센목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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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센목장에서 점심을 먹은 후 소문난 밀크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하며 다음 일정을 논의했다. 원래 계획은 우리 셋 모두 우에다미술관에서 한 시간 관람하고 감바리우스에 들러 수제 맥주 한잔 걸친 후 요나고 역으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일정을 바꾸면 어떨까하고 제안했다. 우에다미술관에 1도 관심이 없던 아내와 아이였는데 루프버스 오는 길에 ‘모리노쿠니(森の国)’라는 자연체험 테마파크(?)를 보고서는 미술관 대신 거기서 놀고 있을 테니 나더러 2시간 미술관 혼자 관람하고 모리노쿠니로 와서 합류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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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극한 성은은 거두기 전에 낼름 받아먹어야 하는 법. 올레 앗싸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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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센목장을 출발한 나는 우에다쇼지미술관에서 하차했고, 아내와 아들은 루프 버스에 남아 모리노쿠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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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바로 우에다쇼지사진미술관의 첫 인상이었다.

절제된 선과 면을 이용해 조곤조곤 공간을 분할하며 착실히 그려 놓은 펜화 같은 풍경이다. 1995년에 개관한 이 곳은 우에다 쇼지(植田正治)의 대표작인 소녀사태(少女四態)를 모티브로 건축가 다카마스 신(高松伸)이 디자인했으며, 그의 사진 15,000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정면에 보이는 네 개의 박스가 네 명의 소녀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버스정류장에서의 관점으로는 창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에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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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사태(少女四態) ©우에다 쇼지,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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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종종 자신이 품고 있는 예술품 못지 않게 예술적인 경우가 많다.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이 그러하고 우리 가까이 승효상의 솔거미술관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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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미술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사실 내겐 우에다의 사진보다 다카마스의 건축물이 좀 더 매력적이었음을 고백한다. 친근한 피사체를 주어진 프레임 내에 재치있게 배치한 우에다의 명석한 사진이었지만, 그의 사진을 관통하는 연출적 요소는 결국 나의 테이스트완 결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미술관에 머문 두 시간 동안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한 시간은 30분을 채 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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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고 또 걸었다. 크지 않은 미술관이지만 기둥 하나, 창문 하나 놓칠새라 안과 밖을 쏘다니며 욕심스레 눈에 담고 또 담았다. 반듯하고 절제된 콘크리트의 육중한 직선과 다이센산의 자연을 허심탄회하게 실내로 들여오는 과감한 윈도우는 건축가의 조율아래 기가 막히게 균형을 이루며 관람자를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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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인지방에서 나고 자라며 평생 산인지방의 자연과 사람을 담아 낸 사진가 우에다 쇼지. 전날 돗토리 사구에서 만났던 전설은 다이센산 기슭에 터를 잡은 채 견고하게 전승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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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떠나기에 앞서 잠시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아쉬움을 우에다와 함께 한 이 사진 한장으로 달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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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구의 전설

“여보, 돗토리 어때?”

“잉? 돗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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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로 있던 내게 돗토리는 이렇게 불쑥 치고 들어왔다.

시작은 ‘대구-오사카’간 특가항공권이었다. 성인 1인당 68,000원이라는 사지 않을 수 없는 가격이라 아내는 일단 표부터 끊어놓았던 것. 막상 출발일이 한달 앞으로 다가오자 “오사카 가서 뭐하지?”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는데, 8월의 오사카는 한마디로 ‘으악’이라는 주변의 무용담에 덜컥 겁이 나버렸다. 게다가 주변도시인 교토를 비롯 고베, 나라까지 최소 한번 이상 들렀던 곳이라 흥미가 1도 일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아내가 돗토리는 어떠냐며 물어왔던 것.

나와 마찬가지로 아내 역시 오사카를 제외한 다른 여행지를 검색하던 중 아들내미가 좋아하는 ‘명탐정 코난’의 작가인 아오야마 고쇼(青山剛昌)의 고향이 돗토리며, 이곳 돗토리현에 코난박물관와 함께 매년 코난 미스터리 투어가 열린다는 걸 알았다. 좀더 파본 결과 올해는 아쉽게도 코난 미스터리투어가 돗토리현이 아닌 야마구치현에서 개최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동해를 마주하고 일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한적한 이 곳 돗토리현의 매력에 이미 빠져버린 후였다.

세계지명사전에 따르면 돗토리(鳥取_조취)에는 예로부터 습지에 물새가 많이 살았는데 이 새를 잡아 정부에 진상하는 주민을 돗토리베(鳥取部)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하지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돗토리=사구”라 할만큼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언덕인 사구(砂丘)가 유명하댄다. 오죽하면 이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체인 이름까지 ‘すなば_스나바(모래밭, 모래벌판)’겠는가?

떠도는 정보로는 돗토리 사구가 아시아에서 제일 유명하다느니 혹은 일본 3대 사구라느니 하며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평가는 대체 누가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여행지에 대한 기대는 직접 보기전까지 최대한 담백하게 가져가는게 지혜임을 나름의 경험으로 잘 알기에 묻지마 랭킹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저 동서 16km 일본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라는 물리적 크기 그 자체에 흥미가 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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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앞 터미널에서 사구로 출발하는 7시 첫 차를 타기 전 주변을 잠시 걸었다. 생판 낯선도시건만 한적한 거리와 오밀조밀 낮은 건물에 매달린 번잡하지 않은 간판들에 마음이 편하다. 내가 나고 자랐던 소도시 풍경 딱 그만큼이라 좋다. 삐죽이 솟은 못생긴 빌딩사이 실핏줄마냥 얽혀버린 골목사이로 당장이라도 동맥경화가 걸릴 듯이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오사카 같은 거대도시는 당췌 정이 붙질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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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분이다. 바로 저기 4번 플랫폼으로 사구행 첫 버스가 들어올 것이다.

과연 여행으로부터 느끼는 즐거움의 비중을 시기별로 굳이 나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자료 조사하며 여행지를 고민하는 여행 전 준비단계가 즐거움의 50%정도 될 것 같고, 현지에서 부닥치는 고생스러움의 마이너스 작용에 의한 여행 중 체감 즐거움은 20% 정도로 낮으며, 좋은 추억들만 잘 추스리고 좋지 않았던 기억마저 잘 포장해서 참하게 색인해주는 영특한 우리 뇌 덕분에 여행 후 만족도는 30% 정도의 비중을 가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낯선 사구행 버스를 기다리는 지금, 당시 나는 여행 중의 기대감을 너무 과소평가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예정된 플랫폼으로 천천히 들어왔고 관광객답지 않은 의연함으로 뒷문에 올랐다. 버스는 정각에 출발하여 한적한 돗토리 시내를 통과한다. 평일이지만 출근하기엔 이른 시간인지 버스에 오르는 이는 많지 않다. 이십분 남짓 달린 버스는 사구입구 정류장에 도착했고, 전날 구입해두었던 3일짜리 무제한 버스패스를 마패처럼 당당하게 기사양반에게 보여주며 경쾌한 걸음으로 하차했다.

낯선 장소의 냄새를 각인시키려 깊은 들숨을 쉬지만 한 여름날의 니맛도 내맛도 아닌 미적지근한 아침공기는 상쾌함과는 분명 거리감이 있다. 미련없이 나는 잰 걸음으로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학습해두었던 최단코스를 따라 사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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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찜해두었던 그 구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순식간에 광활한 모래세상이 펼쳐진다. 중거리에서 원거리로 시선을 옮아감에 따라 구릉진 모래언덕 너머로 그 이름 반가운 동해가 무게중심을 잡아준다. 이곳은 오직 모래와 바다 그리고 잔뜩 찌푸린 하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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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벅서벅 발이 빠지는 모래밭을 걷는 것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눈 앞에는 거대한 모래언덕이 동해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다. 우마노세(말의 등)다. 높이 50미터 가량의 동서로 길죽하게 뻗은 모래언덕이다. 이 거대한 덩치를 눈앞에 마주한 닝겐은 너나할 것 없이 기필코 오르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일어버리는 듯 하다. 그리고 결국 운명처럼 하나같이 말 등에 붙어 낑낑대는 개미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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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환해지자 관광객들이 본격적으로 몰려든다. 여행 전 머리 속에 그려두었던 사구적 풍경(?)이 갖추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이미 지쳐버린 몸뚱아리를 독려했다. 사실 그늘 하나 없는 모래사장에서 몇 시간째 사진 찍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다. 새벽 호텔을 나서며 챙겨 온 생수 한 병이 달다. 하지만, 작정하고 나가도 하루 한롤 찍기 어려운 나임에도 어느새 두 롤째다. 아마 다시는 못볼 풍경이라는 이유가 먼저일테고 필름 시작한지 이제 1년을 넘기면서 셔터문턱 또한 많이 낮아졌음이 두번째일거다. 하긴 올해들어 8개월 동안 벌써 50롤 이상을 찍었으니 한주 한롤이던 작년에 비해 필름 소모량이 증가한 것이다. 익숙함이란 그런건가 보다. 작년 6월 첫 롤 로딩 때 잔뜩 힘이 들어가 굳었던 어깨는 세월이 자남에 따라 부드러워지고 P사장님의 오리지날 레더케이스로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그립감을 자랑하는 바디는 손 안에서 춤추듯 주어진 임무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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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토리와 동해를 공유하고 있는 탓일까? 어머니의 넉넉한 실루엣이 연상되는 사구는 우리네 제주오름과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는 자연스레 김영갑선생님으로 이어졌다. 촉촉한 초록의 오름과 달리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모래세상인 이 곳에서 우에다 쇼지(植田正治)는 과연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일까? 다음 날 예정된 우에다쇼지 사진미술관이 자못 궁금해졌다. 국적이 다른 전설(傳說)이건만, 전설은 전설끼리 손을 맞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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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이용원

센텀 이전의 수영비행장 시절부터 쭈욱 이어져온 꽤나 오래된 이용원
그땐 군인들 머리를 그렇게도 많이 만지셨다는데, 지금은 동네 단골 아저씨  몇 분만 들락거릴 뿐이다.

처음에 이 이용원을 알게 된 것은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이다.
천방지축 개구쟁이 1학년 아들을 아침저녁으로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을 눈에 담게 된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다.
나는 아주 가끔 일이 빨리 끝난 날 아이를 데리러 가는데 동참하곤 했다.

우리 집에서 나와 건널목을 건너면 바로 접하게 되는 곳이 신흥반점과 나란히 붙어 있는 이 대성이용원이다.
이 신흥반점도 해운대 우동에 오래 사셨던 분들 말로는 꽤나 맛으로 유명하다 했는데 우리는 아직 시켜먹어 보진 못했다.

신흥반점은 항상 문이 굳게 닫혀있어 배달전문 중국집임을 티 내는 듯했으나,
그 옆 대성이용원은 항상 문이 열려있고 발이 바람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틈으로 얼핏 보이는 것이 서서 머리를 감는 타일욕조와 바가지가 담겨져 있는 빨간 다라이

이 얼마나 오랜만에 보던 풍경인가.
중학교 시절 학교 앞 단골 이발소가 꼭 이런 모양이었다.
지금은 다들 전기바리깡을 사용하지만 우리 때는 손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었다.
가끔씩 바리깡에 머리가 씹히면 어찌나 아프던지 “아야”하고 소리를 내면
이발소 아저씨는 엄살피지 마라며 꿀밤을 먹이시곤 하셨는데……

그때의 그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런 이발소가 아직 있다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산의 대표적인 도심공간인 센텀에 이런 오래된 이용실이 있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그런데 내 눈에만 반갑고 신기한 곳은 아니 였나 보다.
우리 아이가 어느 날 이곳이 궁금하다며 한번 들어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

나는 옳다구나 이때 구나를 속으로 외치며
“그러면 너 저기서 머리 손질해야 하는데 엄마랑 미용실 안가고 저기서 머리 깎을래?” 라고 물어 봤다.
‘응” 너무나 간단하고 명확하게 대답을 한다.

그 주 일요일 오후 드디어 대성이용원에 우리 세 식구 총 출동을 한다.
이발소 아저씨랑 사모님이랑 손님 한 분이 오잉? 요 사람들 뭐지? 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본다.

꼬맹이를 앞세우며 “요 녀석 요기 앞에 초등학교에 이번에 입학했는데 요기서 머리 깎고 싶다고 해서 왔습니다.”
하며 인사드리니 ” 그래 미용실에서는 파마만 할줄알지 그냥 사내 머리는 잘 못짤러”라며 반겨주신다.

능숙한 손짓으로 어린이용 보조의자를 이발소 의자에 걸치시며
“여기 와 앉아 보거래이, 아빠가 올려줘야겠네”
머리를 자르시다가 나를 힐끔 한번 보신다.
“아..저..결국 남는 건 사진 뿐이더라고예, 옆에서 쫌 찍어도 되지예?”
“그라면 뭐 그라던가”
옆에 계시던 사모님께서 거들어 주신다.
“맞다 낸중에 보면 사진빡에 없다. 마이 찍어가소”

그렇게 몇장의 기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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